타이라노 키요모리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 1118년 - 1181년 3월 20일)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이자 공경(公卿)이다. 무사로서 최초로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라 무가 정권 수립의 초석을 다졌다.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수장으로, 아버지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의 뒤를 이어 세력을 확장했다.
생애
키요모리는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승리하며 조정 내 입지를 굳혔다.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인세이(院政) 하에서 권력을 장악하며 자신의 딸을 천황의 비로 들여 외척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권세는 절정에 달하여 교토의 로쿠하라(六波羅)를 중심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서해 방면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키요모리의 독단적인 정치 운영과 헤이시 일문의 권력 독점은 귀족과 사원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고시라카와 상황(後白河上皇)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상황을 유폐하고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을 옹립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키요모리의 전횡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규모의 반 헤이시 봉기로 이어졌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의 거병을 시작으로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이 발발했다. 키요모리는 전쟁 초기에 병사하여 헤이시 정권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그의 사후, 헤이시 일문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게 패배하고 멸망했다.
평가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무사로서 처음으로 조정의 최고위직에 올라 무가 정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욕과 독단적인 정책으로 인해 귀족 사회의 반발을 초래하고, 겐페이 전쟁을 야기하여 헤이시 일문의 몰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생애는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로 넘어가는 격동기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