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조 덴노
고산조 덴노 (일본어: 後三条天皇, ごさんじょうてんのう, 1034년 9월 3일 ~ 1073년 5월 8일)는 일본의 제71대 천황 (재위: 1068년 5월 22일 ~ 1072년 1월 18일)이다. 휘(이름)는 다카히토(尊仁).
개요 헤이안 시대 말기의 천황으로, 고스자쿠 천황의 제2황자이다. 어머니는 산조 천황의 딸인 데이시 내친왕(禎子内親王)으로, 약 170년 만에 후지와라 씨 출신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천황이었다. 이는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후지와라 씨의 셋칸 정치(摂関政治, 섭관 정치)에서 벗어나 천황 친정(親政)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셋칸 정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천황 중심의 정치를 재건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생애
- 출생 및 배경: 1034년 고스자쿠 천황과 데이시 내친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계가 후지와라 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황위 계승 서열에서는 후지와라 씨 외척의 지지를 받는 다른 황자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형인 고레이제이 천황에게 아들이 없어, 후지와라 씨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1068년 고레이제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 재위와 개혁: 즉위 후 고산조 천황은 후지와라 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천황 중심의 정치를 추진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069년에 공포한 정리장원령(整理荘園令)이다. 이는 당시 무분별하게 확대되어 국가의 세수 기반을 잠식하고 있던 장원(荘園, 쇼엔: 면세 및 불입권 특혜를 가진 사유지)의 설치를 강력하게 규제하고, 기존 장원의 합법성을 심사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기록장원권계소(記録荘園券契所, 키로쿠조)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장원 관련 서류를 철저히 심사했다. 이 개혁은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천황의 직할령(국가 수입)을 늘려 천황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도 시도했다.
- 양위와 죽음: 1072년, 아들인 사다히토 친왕(훗날 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세이(院政: 상황에 의한 정치)를 시작하여 개혁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양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1073년에 사망했다. 비록 직접 인세이를 통해 오랫동안 정치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후대의 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를 통해 천황 중심의 권력을 확립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가 고산조 천황은 셋칸 정치의 전성기에 균열을 내고 천황 중심의 정치 부활을 시도한 개혁적인 군주로 평가받는다. 정리장원령은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고 국가의 수입 구조를 재편하려 했던 중대한 정책이었으며, 이는 이후 일본 중세 사회로의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짧은 재위와 인세이 시도에 그쳤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아들 시라카와 천황에게 계승되어 인세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연호
- 지랴쿠 (治暦, 1065년 8월 2일 ~ 1069년 4월 13일) - 즉위 전부터 사용하다가 1069년 개원.
- 엔큐 (延久, 1069년 4월 13일 ~ 1074년 8월 23일)
능묘 능묘는 엔소지릉(円宗寺陵)으로, 교토(京都)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