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구국정부
세르비아 구국정부 (세르비아어: Влада народног спаса / Vlada narodnog spasa, VNС)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세르비아 지역에 존재했던 세르비아인 협력주의 정부이다. 1941년 9월 1일부터 1944년 10월까지 존속했으며, 지도자는 전 유고슬라비아 육군 장성이었던 밀란 네디치(Milan Nedić) 총리였다.
이 정부는 명목상 세르비아를 통치했으나, 실제 권력은 전적으로 독일 군사 행정부(Militärbefehlshaber in Serbien)에 있었다. 따라서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정부라기보다는 독일의 괴뢰 정부 성격을 띠었다. 흔히 이를 이끌었던 밀란 네디치의 이름을 따서 네디치 세르비아(Недићева Србија / Nedićeva Srbija)라고도 불린다.
배경
1941년 4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빠르게 점령하고 분할했다. 세르비아 영토의 상당 부분은 독일 군정 하에 놓였으며, 독일은 점령지 통치를 위해 현지 협력주의 행정 기구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전의 단명한 협력주의 정부인 커미서 행정부가 효과적이지 못하자, 독일은 대중적 지지가 비교적 높았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밀란 네디치에게 정부 수립을 요청했다.
수립 및 목적
밀란 네디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르비아 민족의 더 큰 피해를 막고 공산주의 세력(파르티잔)으로부터 세르비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의 요청을 수락하여 1941년 9월 1일 구국정부를 수립했다. 그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세르비아 내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특히 유고슬라비아 왕정주의자 체트니크와 공산주의 파르티잔 간의 내전 및 독일의 가혹한 보복 조치로부터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독일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영토와 통치
구국정부의 통치 구역은 독일 군정 하의 세르비아 핵심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전간기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전체 영토보다 훨씬 작았다. 보이보디나의 일부는 헝가리와 독일에, 코소보와 메토히야의 대부분은 이탈리아가 점령한 알바니아에 합병되었고,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합병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포함되었다.
구국정부는 독일의 엄격한 감독 하에 행정, 사법, 교육 등의 기본적인 통치 기능을 수행했다. 경제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는 데 집중되었다.
정책과 활동
구국정부의 주요 정책 및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 협력: 독일 점령 당국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 저항 세력 진압: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파르티잔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왕정주의자 체트니크 등 다양한 저항 세력에 대한 진압 작전에 독일군과 협력하거나 자체적인 무장 조직을 동원했다. 주요 자체 무장 조직으로는 세르비아 국가방위대(Српска државна стража / Srpska državna straža, СДС)가 있었다.
- 반유대주의: 독일의 홀로코스트 정책에 협조하여 유대인 색출, 재산 몰수, 강제 수용소 이송 및 학살에 관여했다. 세르비아 지역은 유럽에서 비교적 빠르게 '유대인 문제'가 해결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강압과 현지 협력자들의 조력 때문이었다.
- 질서 유지: 점령지 내 치안 및 행정 질서 유지에 힘썼다.
종말
1944년 가을, 동부 전선에서의 독일군 후퇴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및 소련 붉은 군대의 세르비아 진격으로 인해 독일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구국정부도 붕괴되었다. 밀란 네디치와 그의 정부 구성원들은 독일군과 함께 세르비아에서 철수하여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전쟁 종료 후 네디치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로 송환되었고, 1946년 베오그라드에서 의문사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구국정부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논란이 많은 시기이며, 협력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