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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라이 드 톨리

미하일 보гда노비치 바클라이 드 톨리 공작 (러시아어: Князь 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 독일어: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1761년 12월 27일 ~ 1818년 5월 26일)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 원수, 공작이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焦土 작전(초토 작전)을 통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생애

바클라이 드 톨리는 리보니아(현재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스코틀랜드에서 발트해 연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6년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튀르크와의 전쟁, 스웨덴과의 전쟁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경력을 쌓았다.

1806년-1807년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809년 핀란드와의 전쟁에서는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건너는 과감한 작전을 성공시켜 핀란드를 러시아 제국에 병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바클라이 드 톨리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병력의 열세와 나폴레옹 군대의 압도적인 공세에 맞서 정면 대결을 피하고, 후퇴하면서焦土 작전(초토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러시아 영토 깊숙이 나폴레옹 군대를 유인하여 보급선을 늘어뜨리고,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이용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퇴 전략은 러시아 사회의 불만을 샀고, 결국 미하일 쿠투조프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보로디노 전투 이후, 쿠투조프 역시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후퇴했지만, 바클라이 드 톨리의 초토화 작전은 나폴레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1813년, 바클라이 드 톨리는 다시 러시아군에 복귀하여 유럽 해방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쿨름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파리 점령에도 참여했다. 전후 그는 원수로 진급했고, 공작 작위를 받았다.

바클라이 드 톨리는 1818년, 독일의 인스터부르크(Insterburg, 현재의 러시아 체르냐홉스크)에서 사망했다. 그는 러시아 군사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전략은 이후 많은 군사 전략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평가

바클라이 드 톨리는 전략적 사고와 결단력을 갖춘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의 초토화 작전은 러시아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의 전략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 군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