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공방전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제1차 십자군 전쟁(1096년 - 1099년) 기간 중 1097년 10월부터 1098년 6월까지 현재 튀르키예 영토 내에 위치한 도시 안티오키아를 놓고 십자군과 셀주크 투르크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안티오키아는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비잔티움 제국 시절부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십자군은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배경
십자군은 1097년 니케아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안티오키아로 진군했다. 안티오키아는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야기 시얀(Yaghi-Siyan)이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십자군의 지도자들은 보에몽, 레몽 드 생질, 고드프루아 드 부용 등이었으며, 이들은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기로 결정했다.
포위전
포위전은 장기간 이어졌고, 십자군은 식량 부족과 질병에 시달렸다. 야기 시얀은 지속적으로 십자군을 공격하며 보급을 방해했다. 십자군은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보급로가 유지되고 있었다. 보에몽은 도시 내부의 배신자를 매수하여 성벽의 한 부분을 열도록 계획했다.
점령
1098년 6월 3일, 보에몽의 계획이 성공하여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에 진입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십자군은 도시를 점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케르보가(Kerbogha)가 이끄는 대규모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안티오키아를 포위했다.
역포위와 성 유물 발견
십자군은 역포위된 상황에서 사기가 저하되었지만, 성창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성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용된 창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발견한 것은 십자군의 승리를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케르보가의 군대와 야전에서 맞붙어 승리했다. 이 승리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안티오키아는 보에몽의 영지가 되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이 세워졌다.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십자군의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