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백두산에 세운 비석이다.
개요
조선과 청나라는 백두산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나, 명확한 경계선이 설정되지 않아 분쟁의 소지가 있었다. 특히 간도 지역을 둘러싼 문제가 심각해지자, 숙종은 청나라에 국경 획정을 제의했고, 청나라 역시 이를 받아들여 양국 대표가 백두산에 모여 국경을 정하게 되었다.
건립 과정
1712년 5월, 조선에서는 박권(朴權)이, 청나라에서는 목극등(穆克登)이 대표로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확정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雍正十一年歲次癸亥五月十五日 穆克登奉勅相視 勒石于此 爲界也 (옹정 십일년 세차 계해 오월 십오일 목극등 봉칙상시 륵석우차 위계야)"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于分水嶺上 勒石 乙 未爲定界 矣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우분수령상 륵석 을미위정계 의)"
(해석: 옹정 십일년(강희 51년) 계해년 오월 십오일에 목극등이 칙명을 받들어 살펴보건대, 이에 돌에 새겨서 경계를 삼는다.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니,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서 경계를 정한다.)
의미와 영향
백두산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비문에 언급된 '토문'의 위치에 대한 해석이 달라 이후 간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여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의 지류로 해석하여 간도 지역이 청나라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대한제국과 청나라 간의 간도 협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비석의 행방
백두산정계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다시 확인되었다. 발견된 파편을 통해 비석의 크기와 형태 등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