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전제주의
동양의 전제주의는 서양의 사상가들이 동양 사회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개념으로, 군주가 법이나 전통, 기타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주로 유럽의 제한적인 왕권이나 입헌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이 개념은 몽테스키외, 헤겔, 마르크스, 비트포겔 등 다양한 서양 사상가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 몽테스키외는 기후나 지리적 요인과 연관하여 동양의 광대한 영토와 비옥한 땅이 전제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양의 정부 형태를 공화정이나 군주정과 다른 '전제정'으로 분류하며, 이곳에는 명예의 원칙 대신 공포가 지배한다고 보았다.
- 헤겔은 동양 사회가 역사 발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개개인의 자유나 이성이 발현되지 못하고 단 한 명의 지배자(군주)만이 자유로운 상태, 즉 전제주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과 관련하여 동양의 전제주의를 설명했다. 그는 아시아 사회에서 토지와 물을 포함한 생산 수단이 국가 또는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중앙 집권적인 국가 권력이 농업 생산과 잉여 생산물의 수취를 통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 칼 비트포겔은 특히 대규모 관개 사업이 필수적인 '수리(水利)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와 전제주의가 발달한다고 주장하며, 중국, 인도, 고대 이집트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이러한 사회에서는 거대한 관개 시스템 유지를 위해 관료제적 전제 국가가 형성되며, 개인의 자유나 사유 재산권이 약화된다고 보았다.
동양의 전제주의는 군주의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력, 국가의 토지 및 노동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 사유 재산권이나 시민적 권리의 부재, 피지배층의 무권리 상태 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여겨졌다. 이는 동양 사회가 정체되어 있고 변화가 느리다는 인식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의 전제주의' 개념은 등장 초기부터,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강력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가장 주된 비판은 다음과 같다.
- 유로 중심적 시각: 동양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서양의 기준과 편견으로 단순화하고 왜곡했다는 지적이다.
- 역사적 부정확성: 실제 동양 역사에서는 군주의 권력이 법, 전통, 신하들의 간언, 백성의 저항 등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제약받았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나 지방 자치도 존재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 개념의 모호성: '동양'이라는 지리적 범주가 너무 넓고, 각 지역 사회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 정치적 사용: 서양 우월주의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거나 동양 사회의 '후진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결론적으로 '동양의 전제주의'는 동양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서양에서 만들어진 이론적 모델이지만, 그 유효성과 정확성에 대해 역사학 및 사회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대에는 과거와 같은 절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