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 (삼국지 시리즈)
강유(202년 ~ 264년), 자(字)는 백약(伯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이다. 본래 위(魏)나라의 장수였으나, 제갈량(諸葛亮)의 북벌 당시 촉한에 투항하여 중용되었다. 제갈량 사후에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63년 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이후 위나라에 항복한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다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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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과 초기 경력: 강유는 기현(冀縣, 현재의 간쑤성 간구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학문과 무예에 능통했다. 228년 제갈량의 북벌 당시 천수군(天水郡)의 공조(功曹)로서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을 막았으나, 마속(馬謖)의 가정(街亭) 전투 패배로 위나라 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제갈량에게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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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에서의 활약: 제갈량은 강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중용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비의(費禕)와 함께 군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비의 사후에는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촉한의 군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했으나, 곽회(郭淮), 등애(鄧艾) 등 위나라 명장들의 활약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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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263년 위나라가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자, 강유는 검각(劍閣)에서 종회(鍾會)의 군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등애가 음평(陰平)을 넘어 성도(成都)를 공격하자, 후주 유선은 항복을 결정했다. 강유는 항복 후 위나라 장수 종회와 함께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유선을 다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인 사마염(司馬炎)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종회와 함께 살해당했다.
평가
강유는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한의 북벌을 주도한 인물로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충성심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북벌에 집착하여 국력을 소모시키고, 결국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강유를 “지혜가 뛰어나고 병법에 능통했으며,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감행했으나, 결국 촉한을 망하게 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