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의 난
이와이의 난(磐井の乱)은 6세기 초(527년~528년) 일본 고훈 시대에 규슈 북부 지역의 유력 호족인 쓰쿠시국조(筑紫国造) 이와이(磐井)가 야마토 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이는 야마토 정권의 일본 열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배경 6세기 초,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으며, 야마토 정권은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백제를 돕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와이는 당시 규슈 북부 지역의 강력한 세력가로서, 대륙과의 교역을 통해 상당한 부와 힘을 축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토 정권이 가야 지역으로 파병하기 위해 규슈 지역을 통과하려 하자, 이와이는 신라의 사주를 받거나 혹은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위해 이를 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규슈 지역의 교통로를 장악하고 야마토 정권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경과 반란은 527년에 시작되었다. 이와이는 규슈 지역의 여러 호족을 규합하여 야마토 정권에 대항했다. 야마토 정권은 이와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토모노 사히데(大伴佐乎)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진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와이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진압군은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듬해인 528년, 야마토 정권은 모노노베노 아라카비(物部麁鹿火)를 새로운 대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병력을 다시 파견했다. 모노노베노 아라카비가 이끄는 야마토군은 격전 끝에 이와이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이와이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구지(久治)는 야마토 정권에 항복했다.
결과 및 의의 이와이의 난이 진압됨으로써 야마토 정권은 규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야마토 정권이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방의 강력한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복속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의 국제 정세(백제, 신라, 가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와이와 신라의 관계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와이의 난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