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 1월 31일 ~ 1587년 6월 20일)은 센고쿠 시대 규슈 북동부 분고(豊後)를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의 다이묘(大名)이다. 본명은 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鎮)였으나 출가하여 소린(宗麟)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오토모 가문의 21대 당주로서 규슈의 유력 다이묘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기독교와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생애
분고의 슈고(守護) 다이묘 가문인 오토모 가문의 당주 오토모 요시아키(大友 義鑑)의 적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의 당주가 된 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주변 지역을 평정하고 오토모 가문의 세력을 규슈 북부 일대로 크게 확장했다. 한때 규슈 북부의 여섯 개 구니(國)의 슈고 또는 슈고다이(守護代)를 겸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기독교와 서양 문물 수용
오토모 소린은 1550년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분고에 방문한 이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보호했으며, 자신의 영지에 교회를 짓고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 전파를 장려했다. 또한 남만 무역(南蛮貿易)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도 힘썼다. 말년인 1578년에는 세례를 받고 돈 프란시스코(ドン・フランシスコ)라는 세례명을 얻어 일본의 대표적인 크리스천 다이묘가 되었다. 1582년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 공식 사절단인 덴쇼 소년 사절단(天正遣欧使節)을 로마 교황청에 파견하는 것을 후원하기도 했다.
세력 다툼과 몰락
오토모 소린은 규슈 통일을 목표로 인근의 유력 다이묘들과 경쟁했다. 특히 사쓰마(薩摩)의 시마즈(島津) 가문, 히젠(肥前)의 류조지(龍造寺) 가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578년 휴가(日向)의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시마즈 가문에 대패하면서 오토모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시마즈 가문의 역공으로 영토를 상당수 상실하고 궁지에 몰리자, 당시 일본 통일을 진행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는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말년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로 오토모 가문은 멸망을 피하고 본령인 분고를 안도받았으나, 소린 자신은 병으로 1587년에 사망했다.
평가
오토모 소린은 센고쿠 시대 규슈를 대표하는 다이묘 중 한 명이자, 서양 문화와 기독교를 일본에 도입하고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적극적인 서양 문물 수용 정책은 후대 일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