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디 운동
마흐디 운동은 19세기 말(1881~1899년) 수단에서 이집트-영국 연합 세력의 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대규모 종교적, 정치적 반란이다. 이 운동은 스스로를 이슬람의 예언된 구원자인 '마흐디'라고 칭한 무함마드 아흐마드 이븐 압둘라(Muhammad Ahmad ibn Abd Allah)가 주도했다.
배경 19세기 중반 수단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속주인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집트의 통치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으며, 무거운 세금 부과, 노예 무역 근절 정책(영국의 압력에 의한 부분도 있음)에 대한 불만, 그리고 이집트를 통해 유입되는 유럽의 영향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의 순수성 회복과 정의로운 통치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마흐디의 등장과 세력 확장 수피파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1881년 자신이 예언된 구원자 '마흐디'임을 선포했다. 그는 타락한 이집트의 통치와 외세의 간섭에 맞서 지하드(성전)를 선언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안사르'(Ansar, 돕는 자들)라고 불렸다. 마흐디군은 이집트 정부군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렸다.
주요 사건
- 하르툼 함락과 고든 장군의 죽음 (1885년): 마흐디군은 수단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장악하며 마지막 남은 이집트 통치의 중심지인 하르툼을 포위했다. 영국 정부는 유명한 장군인 찰스 고든(Charles Gordon)을 파견하여 이집트 병력과 유럽인들의 철수를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고든은 하르툼을 사수하기로 결정했고, 약 1년간의 포위 끝에 마흐디군은 1885년 1월 하르툼을 함락시키고 고든 장군을 살해했다. 고든의 죽음은 영국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 마흐디 국가의 통치: 하르툼 함락 직후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인 압둘라히 이븐 무함마드(Abdullahi ibn Muhammad), 일명 칼리파(Khalifa)가 마흐디 국가를 통치했다. 칼리파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나, 내부 부족 간의 갈등과 외부(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의 위협에 시달렸다.
- 영국의 수단 재정복 (1896~1899년): 영국은 고든의 복수와 나일강 상류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단 재정복을 계획했다.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의 지휘 아래 잘 훈련되고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이집트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키치너의 군대는 남하하면서 철도를 건설하는 등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
- 옴두르만 전투 (1898년): 1898년 9월 2일, 키치너의 군대는 하르툼 건너편의 옴두르만에서 칼리파의 마흐디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기관총과 대포 등 우수한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이집트 연합군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마흐디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마흐디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끝났다.
결과 및 영향 옴두르만 전투 이후 칼리파는 도주했으나 이듬해인 1899년 사망하면서 마흐디 국가는 완전히 멸망했다. 영국과 이집트는 수단을 '영국-이집트 수단'(Anglo-Egyptian Sudan)이라는 명칭으로 공동 통치하는 방식의 식민지를 수립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통치권을 행사했다. 마흐디 운동은 외부 지배에 맞선 수단 민족주의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여겨지며, 19세기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가장 강력한 반식민지 저항 운동 중 하나로 기록된다. 또한 이 운동은 이슬람 세계에서 마흐디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