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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혁명

동학 농민 혁명은 1894년(고종 31년) 조선 후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이자 반봉건적, 반외세적 성격의 사회 변혁 운동이다. 당시 조선 사회의 심각한 모순, 즉 정치적 부패와 수탈,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농민들의 극심한 생활고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동학 사상의 영향 아래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봉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배경 및 원인

  • 정치·경제적 부패: 탐관오리의 가혹한 수탈, 과도한 세금 부과,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 등으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농민의 삶이 피폐해졌다.
  • 사회적 모순 심화: 신분제 동요와 함께 양반 중심의 차별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 동학 사상의 확산: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평등을 강조하고, 서학(천주교) 및 외세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억압받는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 직접적 계기: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만석보 축조 비용 강제 징수 등)에 반발하여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부 농민 봉기가 혁명의 시작점이다.

전개 과정

  • 1차 봉기 (무장 봉기): 고부 봉기 후 정부의 탄압에 맞서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무장 봉기(백산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은 황토현,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에게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 전주 화약 체결: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는 일본군의 파병으로 이어져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정부와 농민군은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전주 화약을 맺고 휴전하였다. 농민군은 폐정 개혁 12개조를 제시하고, 정부는 이를 수용하는 한편, 각지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 청일 양군 주둔 및 일본의 경복궁 점령: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일 양국 군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내정 간섭을 강화하고, 급기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갑오개혁을 강행했다.
  • 2차 봉기 (반침략 봉기): 일본의 침략 행위에 맞서 전봉준 중심의 남접과 손병희 중심의 북접이 연합하여 다시 봉기했다. 이들은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일본을 배척한다)'를 내세우며 서울 진격을 목표로 하였다.
  • 우금치 전투와 진압: 충청남도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연합군이 전투를 벌였으나, 우세한 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연합군에게 농민군이 대패하였다. 이후 잔여 농민군이 각지에서 항전을 이어갔으나 점차 진압되었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는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혁명은 막을 내렸다.

주요 인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등이 농민 혁명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요구 사항 (폐정 개혁안)

전주 화약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주요 개혁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탐관오리 처벌
  • 토지 제도 개혁 (토지 평균 분작 등)
  • 노비 문서 소각 및 신분 차별 철폐
  • 청상과부 재가 허용
  • 무명 잡세 폐지
  • 왜(일본)와 양(서양)과의 화통(통상) 금지 등

결과 및 의의

동학 농민 혁명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조선 봉건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드러내고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청일 전쟁을 유발하여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갑오개혁 등 정부의 개혁 추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억압받던 민중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며, 민족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선구적 성격으로 평가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