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전투
황석산성 전투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중 조선의 황석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군과 의병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개요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8월,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남부 지역을 다시 침공했다. 이때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황석산성은 일본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별장(別將) 곽준(郭遵)과 권길(權佶) 등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안음·함양 등지의 의병, 백성들이 연합하여 성을 방어했으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등이 이끄는 수만 명의 일본군에게 압도당했다. 열세 속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었고, 성 안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배경 임진왜란 휴전기 이후, 일본은 다시 조선 침략을 준비하여 1597년(정유년)에 재침공을 감행했다.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은 육군을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시키며 조선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려 했다. 황석산성은 경상도 서북부와 전라도 동북부의 경계에 위치한 험준한 산성으로, 이곳을 점령하면 일본군의 호남 진출로가 확보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조선 조정은 황석산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당시 조선군은 임진왜란의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전투 경과 1597년 8월 중순경, 가토 기요마사, 모리 히데모토 등의 일본군 대군이 황석산성으로 접근하여 성을 포위했다. 성 안에는 별장 곽준과 권길을 비롯하여 함양·안음 등지의 의병장 정유길(鄭惟吉), 곽준의 아들 곽재겸(郭再謙), 곽영(郭榮) 등과 지역 백성들이 합세하여 수천 명 규모의 방어 병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앞세워 성벽을 공격했다. 성 안의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무기와 훈련도에서 크게 열세였다. 특히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일본군이 성 안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백병전이 벌어지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
조선군은 끝까지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버텨내지 못했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성 안의 조선군과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곽준, 권길 등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특히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민간인의 희생이 컸다.
결과 및 영향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황석산성의 함락은 정유재란 초기 조선 남부 방어선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국가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조선인의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일본군의 잔혹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된다. 전투 후 황석산성은 폐허가 되었으나, 그 역사적 의미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황석산성지는 현재 대한민국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매년 황석산성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