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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운동

형평사 운동은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조선형평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 운동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전개되었다.

배경

조선 사회는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여전했다. 이들은 호적 기재, 교육 기회, 직업 선택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정들은 스스로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조직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전개 과정

1923년 진주에서 이상룡, 신현수 등을 중심으로 조선형평사가 창립되었다. 형평사는 '형평(衡平)'이라는 이름 그대로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며,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권리 쟁취를 목표로 활동했다.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계몽 운동: 백정들의 교육 수준 향상을 위한 야학 개설,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사회 의식을 고취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데 힘썼다.
  • 차별 철폐 운동: 사회 각 분야에서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을 조사하고, 차별 사례를 공론화하여 개선을 요구했다. 특히 호적 기재 방식 개선, 학교 입학 차별 철폐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 경제적 자립 지원: 백정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협동조합 설립, 직업 알선 등을 추진했다.

형평사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각 지역에 형평사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사회 운동가, 지식인 등도 형평사 운동에 참여하여 지지와 연대를 보냈다.

의의와 한계

형평사 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적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이 운동은 사회적 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이후 사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형평사 운동은 몇 가지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운동의 주도 세력이 지식인 중심이었기 때문에 백정들의 실제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경제적 자립 지원 활동이 미흡하여 백정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사회주의 세력의 유입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운동의 방향성이 변질되기도 했다.

참고 문헌

  • 강만길, 『한국 근대사』, 창작과비평사, 2002.
  • 김대환, 『일제하 조선형평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