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르 왕조
카자르 왕조 또는 하자르 카간국은 서기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현재의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 남동부, 카자흐스탄 서부 지역의 볼가 강 하류와 카스피해 북쪽 연안, 북캅카스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튀르크계 유목 국가이자 왕국이다. 유목 제국의 특성을 가졌으나, 중요 교역로를 장악하고 정착 문명을 포용하며 독특한 정치 및 문화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역사 카자르 카간국은 서튀르크 카간국이 멸망한 후 7세기 중반에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아바르 카간국과 같은 다른 유목 세력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까지 우마이야 칼리파국 및 아바스 칼리파국과 캅카스 지역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국경을 확립했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과는 때로는 동맹, 때로는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정치 및 행정 카자르 카간국의 정치 체제는 독특했다. 최고 통치자는 '카간'이었으나, 실질적인 행정과 군사 지휘는 '벡(Bek)' 또는 '왕'으로 불리는 인물이 담당했다. 카간은 신성시되었으며, 의례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도는 볼가 강 하구에 위치한 이틸(Itil)이었으며, 중요한 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카간국은 여러 튀르크계 부족과 슬라브족, 핀우그르족, 캅카스 부족 등을 지배했으며, 이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경제 카자르는 동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볼가 강을 통한 발트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볼가 무역로'와 흑해 북부를 지나는 '실크로드'의 지류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주요 교역품은 모피, 노예, 꿀, 밀랍 등이었으며, 중동과 비잔티움에서 들어오는 비단, 향신료, 금은 세공품과 교환되었다. 이들은 교역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유지했다.
종교 카자르 카간국은 다종교 사회였다. 지배층은 전통적인 튀르크 샤머니즘(텡그리즘)을 믿었으나, 8세기 말 또는 9세기 초에 지배층과 일부 인구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카자르 카간국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수도 이틸에는 이슬람교, 기독교 공동체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각 종교의 법관이 존재할 정도로 종교적 관용이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다양성은 카자르의 무역 중심지로서의 성격과 관련이 깊다.
쇠퇴와 멸망 10세기 들어 카자르 카간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동슬라브족의 국가인 루스(Rus')의 세력이 강성해졌고, 동쪽에서는 페체네그족의 압력이 커졌다. 960년대에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Sviatoslav I)가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카자르의 주요 도시인 이틸, 사르켈 등을 파괴했다. 이 침공으로 카자르의 중앙 권력은 붕괴되었고,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거나 주변 국가에 흡수되었다. 이후 페체네그족과 다른 튀르크계 부족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카자르 카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산 카자르 카간국의 멸망 이후 그 영향력은 약해졌지만, 동유럽과 북캅카스 지역의 민족 구성과 문화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기원이나 크림 카라이트 등과의 연관성 등이 연구되고 있다. 카자르의 존재는 이 시기 동유럽의 복잡한 정치 및 민족 지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