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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화된 인식론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식론 연구에 경험적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거나 활용해야 한다는 철학적 접근 방식이다. 전통적인 인식론이 주로 개념 분석이나 선험적인 추론을 통해 지식, 정당화, 믿음 등의 본질과 조건을 탐구해왔다면,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간의 인지 능력, 학습 과정, 지식 획득의 실제 과정을 심리학, 신경과학, 인지과학 등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해하고, 이를 인식론적 문제 해결에 적용하고자 한다.

개요

자연화된 인식론은 W.V.O. 콰인(W.V.O. Quine)의 1969년 논문 "Epistemology Naturalized"(자연화된 인식론)를 통해 가장 잘 알려지게 되었다. 콰인은 전통적인 인식론적 기획, 특히 감각 경험으로부터 과학 전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대신 인간이 감각 입력으로부터 이론적 산출(지식, 믿음)을 어떻게 얻어내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인식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의 관점에서 인식론은 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심리학의 한 분야가 된다.

배경

전통적인 인식론은 데카르트 이후로 확실한 기초 위에서 지식을 구축하거나, 보편적인 정당화 기준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회의주의 문제, 귀납의 문제, 정당화의 기준 자체에 대한 무한 퇴행 문제 등 다양한 난관에 봉착했다. 특히 논리 실증주의의 프로젝트가 과학의 토대를 감각 경험에 두려 했으나 여러 한계에 부딪히면서, 경험적 과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모색이 필요해졌다. 자연화된 인식론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학적 분석만으로는 인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인식과 과학적 방법론의 성공에 힘입어 등장했다.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전통적 인식론의 포기: 감각 경험으로부터 과학을 정초(foundation)하고 정당화하려는 전통적 기획은 불가능하며 포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2. 심리학으로의 전환: 대신 인식론의 과제는 인간의 감각 기관에 가해지는 물리적 자극(입력)이 어떻게 과학 이론이나 세계에 대한 믿음 체계(출력)로 연결되는지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된다. 이는 심리학의 한 분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기술성(Descriptiveness): 전통적 인식론이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또는 '무엇이 정당화되는가?'와 같은 규범적인 질문에 답하려 했다면,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지식을 얻는가?'와 같은 기술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4. 순환성 허용: 과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 외적인 토대를 찾는 대신, 이미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과학(특히 심리학)을 이용하여 지식 획득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순환이지만, 유익하고 실행 가능한 순환이라고 본다.

자연화된 인식론의 다양한 형태

콰인의 급진적인 제안 이후, 자연화된 인식론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모든 자연화된 인식론이 콰인처럼 인식론을 완전히 심리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 온건한 자연화: 인식론 연구에 과학적 발견(심리학, 신경과학 등)을 중요한 자료나 자원으로 활용하되, 규범적인 문제(정당화, 합리성 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입장이다. 과학적 사실이 우리가 무엇을 정당화된 믿음으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신뢰론(reliabilism) 등이 온건한 자연화된 인식론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 강력한 자연화: 콰인처럼 인식론의 대부분 또는 전체를 경험 과학의 일부로 보거나, 철학적 분석만으로는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비판

자연화된 인식론은 다음과 같은 비판에 직면한다.

  1. 규범성 문제: 가장 흔한 비판은 자연화된 인식론이 인식론의 본질적인 측면인 규범성('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어떤 믿음이 합리적인가?')을 간과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이다. 지식이나 정당화는 단순히 '실제로 이렇게 믿는다'는 기술적 사실을 넘어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규범적 측면을 포함하는데, 자연화된 접근은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2. 순환성 문제: 지식 획득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이미 '지식'으로 간주되는 과학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순환이며, 이는 전통적 인식론이 피하려 했던 정당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콰인은 이를 실용적인 순환으로 보았지만, 비판자들은 근본적인 정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3. 개념 분석의 중요성 간과: 인식론은 '지식'이나 '정당화'와 같은 개념의 본질과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연화된 인식론은 이러한 개념 분석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다.

영향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연화된 인식론은 현대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식론자들이 심리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등의 연구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 탐구하도록 자극했다. 특히 신뢰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정당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관련 개념

  • 인식론
  • 과학철학
  • 심리학
  • 인지과학
  • 신뢰론 (Reliabilism)
  • W.V.O. 콰인
  • 경험주의
  • 정초주의 (Foundationalism)
  • 정합론 (Coherent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