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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비엣민) 사이에 베트남 북서부의 디엔비엔푸에서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비엣민이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종식되었다.

배경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베트남 독립 세력(비엣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비엣민 주력 부대를 평지 전투로 유인하여 섬멸하려 했고, 이를 위해 비엣민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라오스로 가는 길목인 전략적 요충지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비엣민을 유인하여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다. 프랑스는 이곳에 정예 부대 약 1만 3천 명을 배치하고 강력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전개 비엣민의 총사령관 보응우옌지압 장군은 프랑스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디엔비엔푸 기지를 포위했다. 비엣민은 수십만 명의 인력과 자전거, 노새 등을 동원하여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중포들을 분해하여 산악 지형을 넘어 디엔비엔푸 분지를 둘러싼 고지대에 은밀히 배치했다. 1954년 3월 13일, 비엣민은 예상치 못한 대규모 포격과 함께 프랑스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공중 보급과 지원에 의존했지만, 비엣민은 곧 프랑스군 기지의 활주로를 파괴하여 고립시켰다. 비엣민은 정교한 참호망을 구축하고 프랑스군 방어선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포위 공격과 대규모 보병 돌격을 감행했다. 프랑스군은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비엣민의 압도적인 병력과 물량(중국 및 소련 지원), 뛰어난 포병 운용, 그리고 지형적 이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전투 끝에 프랑스군 기지의 방어선은 차례로 무너졌다.

결과 두 달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보급 부족과 엄청난 병력 손실(사망, 부상, 실종 포함 7천 명 이상)로 인해 항전 능력을 상실하고 1954년 5월 7일 항복했다. 약 1만 1천 명의 프랑스군 및 연합군 병력이 비엣민의 포로가 되었다. 비엣민 역시 막대한 인명 피해(사상자 2만 명 이상 추정)를 입었다.

영향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는 프랑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같은 해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협정으로 이어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완전 철수와 베트남의 분단(북위 17도선 기준)을 확정지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약소국도 충분한 준비와 전략을 통해 강대국을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또한, 이는 이후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