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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반탁은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치 운동으로, 주요 내용은 한반도에 대한 국제적인 신탁통치 실시 방안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특히 1945년 12월 미국, 소련, 영국 3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최장 5년간의 한국 신탁통치 실시가 결정되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배경

1945년 8월 일제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된 후, 연합국 사이에서는 한국의 독립 준비 과정과 미래 통치 형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최장 5년간 4개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전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한국에 전해지자, 많은 정치 세력과 국민들은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신탁통치 실시에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 이승만 등 대부분의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와 집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좌익 세력(특히 조선공산당) 역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소련의 방침이 신탁통치 결정 자체를 지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쪽으로 선회하자, 좌익 세력은 입장을 바꾸어 신탁통치 '찬성' 또는 '절대 반탁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한반도의 좌우익 대립은 극에 달했으며, 반탁운동은 좌우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우익은 '반탁'을 민족자주 독립의 상징으로, 좌익은 '신탁통치 찬성'(또는 미소공동위원회 지지를 통한 신탁통치 수용)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주장하며 격렬하게 충돌했다.

영향

반탁운동은 결과적으로 신탁통치 결정 자체를 철회시키지는 못했으나, 해방 정국의 정치 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좌우익 간의 이념적 대립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 노력을 좌절시키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해방 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정치적 논쟁 중 하나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