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바나 무네시게
타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1567년 9월 1일 ~ 1632년 11월 21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무장, 다이묘이다. 규슈의 유력 다이묘 가문인 오토모 씨(大友氏)의 가신이었던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같은 오토모 씨의 중신이자 '규슈의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타치바나 도세쓰(立花道雪)의 양자가 되어 타치바나 가문을 계승했다.
양부인 도세쓰와 친부인 쇼운 모두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무네시게는 이들의 역량을 이어받아 규슈 통일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1587년) 당시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하고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로부터 지쿠고 국(筑後国)의 야나가와(柳河) 13만 2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게이초의 역, 文禄・慶長の役)이 일어나자 휘하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출병하여 벽제관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대립이 심화되자,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의리를 지켜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서군에 가담했다. 본전에서는 직접 싸우지 않았으나, 규슈에서 동군 측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서군이 패배하자 영지를 몰수당하고 낭인(浪人)이 되었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명성이 높았고, 패배 후에도 의리를 지키는 모습이 높이 평가받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다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1610년 무쓰 국(陸奥国) 다나구라(棚倉) 1만 석 다이묘가 되었고, 이후 영지를 늘려 1620년에는 옛 영지인 야나가와 10만 9천 석으로 복귀했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 패장 중 영지를 회복하고 옛 영지로 돌아간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막부의 명령에 따라 오사카 전투(1614년~1615년)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무네시게는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영지 경영 능력도 인정받았으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야나가와 번주로서 번을 다스리다 1632년에 사망했다.
당대의 무장들 사이에서 '사이코쿠 무소(西国無双, 서국무쌍)'라 불릴 정도로 규슈 일대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