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남중 정벌
제갈량의 남중 정벌 (諸葛亮의 南中征伐)은 225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만이라 불리던 중국 남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감행한 군사 작전이다. 삼국시대 촉한은 건안 24년(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관우가 형주에서 전사한 이후,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곧바로 이릉 대전에서 대패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중 지역의 이민족 반란은 촉한의 안정과 북벌 추진에 큰 위협이 되었다.
배경
유비 사후, 남중 지역에서는 옹개, 고정, 주포 등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오나라와 연계하여 촉한을 압박했고, 이는 촉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중 지역의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판단, 직접 남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전개 과정
225년 봄,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남중으로 출정했다. 마속은 신중한 작전을 건의했으나 제갈량은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 작전을 펼쳤다. 그는 먼저 이회에게 옹개의 군대를 막도록 하고 자신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격했다. 제갈량은 맹획을 7번 사로잡았다가 놓아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를 통해 남만인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반란 세력을 진압했고, 마침내 남중 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 및 영향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촉한에 안정적인 후방을 확보해주었다. 또한, 남중 지역의 자원과 인력을 확보하여 북벌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남중 정벌 이후, 이민족 출신 장수들이 촉한의 군대에 합류하여 북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남중 정벌이 촉한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북벌의 시기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평가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촉한의 안정과 북벌 추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과도한 군사적 행동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역사적 평가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