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를레 전투
모를레 전투는 백년 전쟁(1337년-1453년) 기간 중 벌어진 브르타뉴 계승 전쟁(1341년-1364년)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1342년 9월 30일에 브르타뉴 공국의 모르레(Morlaix)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왕국의 지원을 받는 몽포르 가문과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는 블루아 가문 간의 브르타뉴 공위 계승 분쟁 중에 발생했으며,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배경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위를 놓고 그의 이복동생인 몽포르의 장과 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 사이에 계승 분쟁이 발발했다. 몽포르의 장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지지를 받았고, 샤를 드 블루아는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 분쟁은 백년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몽포르의 장을 지원하고 브르타뉴 지역에서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1342년, 잉글랜드의 월터 매니(Walter Manny) 경이 이끄는 병력이 브르타뉴의 주요 도시인 모르레를 공성하기 시작했다.서막
월터 매니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모르레 성을 공성하며 도시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모르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샤를 드 블루아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로베르 7세(Robert VII of Auvergne)는 모르레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구원군을 조직했다. 이 구원군은 잉글랜드군보다 훨씬 많은 수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강력한 기병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수적으로 불리했기에, 월터 매니 경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고 적의 강점인 기병대를 무력화할 전술을 준비했다.전투 과정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은 모르레 외곽에 도착하여 잉글랜드군의 위치를 확인했다. 잉글랜드군은 모르레 성에서 떨어진 숲과 습지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월터 매니 경은 잉글랜드군 전방과 측면에 구덩이(fougeoire)를 파고 나뭇가지와 흙으로 덮어 함정을 만들었으며, 장궁병들을 숲 속에 배치하여 매복시켰다.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의 선봉은 기병대가 맡아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잉글랜드군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거나 지형에 의해 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활 공격을 퍼부어 프랑스 기병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기병대의 공격이 좌절된 후,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의 보병대가 뒤따라 공격해왔으나, 잉글랜드 보병대와 장궁병들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투는 여러 차례의 공격과 방어 반복 끝에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샤를 드 블루아는 간신히 탈출했으나, 많은 병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