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사다 (일본어: 徳川 家定, とくがわ いえさだ)는 에도 막부의 제13대 쇼군이다. 1853년부터 1858년까지 재임했으며,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막부 말기(바쿠마쓰, 幕末) 시기에 해당한다.
생애
제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 家慶)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약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는 기록이 많아 쇼군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쇼군 재임기
1853년 아버지 이에요시의 사망과 동시에 쇼군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은 일본이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는 격변의 시기였다.
- 페리 내항과 개항: 재임 초기에 미국 해군 제독 매튜 C. 페리(Matthew C. Perry)가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내항하여 개항을 요구했다. 막부는 개항을 거부할 힘이 없었고, 결국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체결하여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 두 항구를 개방했다. 이는 200년 이상 지속된 쇄국 정책이 막을 내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 불평등 조약 체결: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도 통상 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일본에 불리한 치외법권, 협정 관세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불평등 조약'으로 불리며,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 내부 갈등 심화: 개항과 조약 체결은 막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고조시켰다. 천황을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확산되었고, 막부 내부에서도 개항을 둘러싼 의견 대립과 쇼군 후계자 문제 등이 얽혀 혼란이 가중되었다.
쇼군 후계자 문제
이에사다는 후사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쇼군 후계자 문제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가장 큰 정치적 쟁점 중 하나였다.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훗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파벌과 기슈(紀州) 도쿠가와 가문의 도쿠가와 요시토미(徳川慶福, 훗날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하는 파벌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의 강행으로 요시토미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사망
1858년 사망했다.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시대에 에도 막부는 붕괴하게 된다.
평가
이에사다 자신은 병약함 때문에 국정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고 주변의 로주(老中)나 다이로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일본이 근대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시기였으며, 페리 내항과 개항, 불평등 조약 체결 등 일본의 운명을 바꾼 사건들이 일어났다. 비록 그의 리더십은 미약했으나, 그 시대에 일어난 일들은 에도 막부 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