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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이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시행한 탄압 정책이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13년의 '분서(焚書)'와 기원전 212년의 '갱유(坑儒)'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배경

진나라의 통일 이후,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법가 사상에 기반한 그의 통치 방식은 유가 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불만을 야기했다. 특히 유가 학자들은 고대 제왕들의 덕치주의를 이상으로 삼으며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주의를 비판했다.

분서 (焚書)

승상 이사는 진시황에게 과거 제도를 비판하고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학자들의 책을 불태울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의약, 점복, 농업 관련 서적을 제외한 역사서, 시경, 서경 등 유가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들이 수거되어 불태워졌다. 이는 진나라의 통치 이념과 다른 사상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사상적 자유를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갱유 (坑儒)

분서 이후에도 유생들의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일부 방사(方士)들이 진시황을 속이고 불로장생약을 구하는 데 실패하자, 진시황은 이에 분노하여 방사들을 처벌했다. 이때 유생들이 방사들을 옹호하자, 진시황은 유생들을 모함과 비방을 일삼는 자들로 규정하고 대량으로 생매장했다. 갱유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유생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향 및 평가

분서갱유는 진나라의 사상 통제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가 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이 위축되었으며,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후대 역사가들은 분서갱유를 진나라의 폭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하며, 진나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분서갱유가 사상 통제의 부정적인 측면 외에도,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