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조선에서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수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배경
19세기 중반 조선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가 극심하여 민생이 피폐해졌고, 대외적으로는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는 민중들 사이에서 확산되었으나, 위정자들은 천주교를 서학(西學)으로 규정하며 배척하였다. 특히,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고 왕권 강화를 위해 쇄국정책을 추진하며, 천주교를 서양 세력과 연관된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였다.
전개 과정
병인박해는 1866년 1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제휴하려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계획이 무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 선교사 체포 및 처형: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신자 학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 특히, 충청도 지역에서 피해가 컸다.
-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만들고, 천주교 탄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결과
병인박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조선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빌미로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는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서양 세력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의의 및 영향
병인박해는 조선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쇄국정책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후 조선 사회의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순교자들의 희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