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가키 다이스케
이타가키 다이스케 (일본어: 板垣退助, 1837년 5월 21일 ~ 1919년 7월 20일)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의 주요 지도자였습니다. 일본의 입헌 정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도사 번(현재 고치현) 출신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이지 유신 과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후 신정부의 산기(参議, 참의)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개혁에 반대하고 민권 신장을 주장하며 1873년 정부에서 물러났습니다.
1874년, 사이고 주도(西郷従道),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등과 함께 민선 의원 설립 청원서(民撰議院設立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하며 자유민권운동을 촉발했습니다. 이 운동은 정부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며 의회 설립을 통해 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타가키는 자유민권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 활동을 펼쳤습니다. 1881년에는 일본 최초의 정당 중 하나인 자유당(自由党, Jiyūtō)을 창설하고 당수가 되어 본격적인 정당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주도한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과 함께 양대 민권파 정당을 이끌었습니다.
1882년 기후에서 강연 중 암살 시도를 당했으나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때 그가 남긴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영원하리라!"(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는 말은 자유민권운동의 상징적인 구호가 되었습니다.
자유당은 정부의 탄압과 당내 분열 등으로 인해 1884년 해산되었으나, 이후에도 이타가키는 정계에서 활동하며 의회 정치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와이한 내각(隈板内閣)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만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사회 활동에 참여하다 1919년 사망했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본이 근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고 입헌주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