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는 1619년 (후금 천명 4년, 명 만력 47년) 음력 3월,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 조선, 몽골 연합군을 사르후 (薩爾滸, 현재의 랴오닝성 푸순시) 일대에서 격파한 전투이다. 명나라가 후금을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으나, 누르하치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인해 명나라군은 각개격파 당하며 참패했다. 이 전투는 명나라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후금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며 명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 몽골 등과 연합하여 대규모 정벌군을 조직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로군 (四路軍)으로 나누어 후금을 공격하려 했다.
전투 과정
- 서로군 (西路軍): 총병 두송(杜松)이 이끄는 서로군은 가장 먼저 출정하여 후금의 군대를 급습하려 했으나, 사르후 인근에서 누르하치의 주력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
- 북로군 (北路軍): 총병 마림(馬林)이 이끄는 북로군은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진군했으나, 역시 누르하치의 군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다.
- 남로군 (南路軍): 총병 이여백(李如柏)이 이끄는 남로군은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후퇴했으나, 퇴각 과정에서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 동로군 (東路軍): 조선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동로군은 명나라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후금군에 항복했다.
결과 및 영향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잃고,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후금은 이 전투의 승리로 세력을 확장하고, 명나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 또한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배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는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사르후 전투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