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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리 전투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현재의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춘계 공세(제5차 공세) 당시 유엔군의 방어선 중 하나인 임진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임진강 전투의 일부이며, 특히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영웅적인 방어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배경

1951년 4월, 중국 인민지원군은 전 전선에 걸쳐 대규모 춘계 공세를 개시했다. 목표는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재점령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중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임진강 방어선 중 서부 전선의 핵심 지역 중 하나인 설마리 일대는 영국군 제29보병여단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글로스터 대대(Gloucestershire Regiment, 1st Battalion)가 사수하는 지역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투 경과

1951년 4월 22일 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임진강 방어선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설마리 일대를 방어하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중공군의 파상 공세에 직면했다. 대대는 설마리 인근의 235고지(후에 글로스터 고지로 불림)를 중심으로 4일 밤낮으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글로스터 대대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고지를 굳건히 지켰다. 4월 24일에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보급 및 증원 경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고립되었다. 식량, 탄약, 식수가 부족해졌으며,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장 커넬(Carne) 중령의 지휘 아래 병사들은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4월 25일 오전,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제29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에게 포위를 뚫고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의 포위망은 더욱 좁혀진 상태였다. 대대원들은 여러 소그룹으로 나뉘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은 중공군에게 붙잡히거나 전사했다. 대대장 커넬 중령을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고, 살아남아 귀환한 대대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결과 및 영향

설마리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전술적으로는 패배하고 사실상 대대가 와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들의 4일간의 영웅적인 지연전은 중공군의 서울 진격을 효과적으로 지연시키는 전략적 성공을 가져왔다.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 덕분에 유엔군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유엔군, 특히 영국군의 용맹함과 희생을 상징하는 전투로 기억된다. 글로스터 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으며, 현재 파주시 설마리에는 글로스터 대대원들의 희생을 기리는 설마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같이 보기

  • 임진강 전투
  • 한국전쟁

참고 자료

  • 한국전쟁 관련 기록 및 사료
  • 참전국 전투사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