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데루모토
모리 데루모토(일본어: 毛利 輝元, 1553년 2월 1일 ~ 1623년 4월 27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일본의 다이묘이다. 센고쿠 다이묘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손자로, 모리 가문의 당주로서 주고쿠 지방의 패자(覇者)인 모리 가문을 이끌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이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후 막대한 영토를 잃고 조슈번(長州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모리 가문의 당주 계승
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적자였던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의 적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다카모토가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할아버지 모리 모토나리는 데루모토를 가문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어린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의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삼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모리 료센'(毛利両川, 모리 가문의 두 기둥)이라 불리며 데루모토의 후견인으로서 가문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모토나리의 사후에는 이들 숙부의 보좌를 받으며 당주의 권한을 점차 확립해 나갔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
모리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력을 확장하며 주고쿠 지방으로 진출하자 대립하게 되었다. 오다 가문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의 영지를 침공하면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가 급부상하자, 데루모토는 히데요시와 화친하고 그에게 복속하였다.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세력을 인정하여 주고쿠 지방 8개 국에 걸친 약 112만 석의 영지를 보장하였으며, 데루모토를 오봉행 중 한 사람으로 임명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주요 구성원으로 대우했다. 데루모토는 히로시마(広島)에 대규모의 히로시마 성(広島城)을 축조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데루모토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주도하는 서군에 가담하였다. 서군의 명목상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으나, 실제 군사 작전 지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맡았다.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모리 군은 남측에 포진했으나, 그의 사촌인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의 방해와 데루모토 본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모리 본대가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서군이 패배하면서 데루모토는 이에야스의 승복을 강요당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의 결과로 모리 가문은 막대한 영지를 잃었다. 당초 모리 가문 전체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웠으나,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노력과 도쿠가와 가신들의 조정으로 완전히 멸문당하는 것은 면했다. 그러나 주고쿠 지방의 광대한 영지를 대부분 몰수당하고, 본래 영지의 일부인 스오(周防)와 나가토(長門) 두 개 국(약 37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에도 시대 이후
영지가 대폭 줄어든 후, 데루모토는 새로운 영지의 경영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야마구치(山口)를 본거지로 삼았으나, 후에 나가토 국의 하기(萩)에 하기 성(萩城)을 쌓고 본거지를 옮겼다. 이렇게 성립된 영지가 에도 막부 시기의 조슈번(長州藩)이다. 그는 조슈번의 초대 번주로서 가문의 재건과 영지 안정에 힘썼으며, 162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인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가 가독을 이었다.
평가
모리 데루모토는 당대 일본 최대 규모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 가문의 당주로서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그의 치세에 모리 가문은 전성기의 영토를 크게 잃었기에 능력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소극적인 행동과 판단은 패배의 한 원인으로 꼽히며 후대의 다양한 평가를 낳았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가문의 위상을 지키고, 세키가하라 패배 후에도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고 다이묘 가문으로서 존속하여 에도 막부 시기 주요 번으로 자리 잡게 한 점에서는 그의 공로도 인정받는다. 조슈번은 이후에도 모리 가문의 후예들이 다스렸고, 막부 말기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중심 세력이 되는 등 일본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