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학살
배경 르완다는 벨기에 식민 통치 시기부터 후투족(전체 인구의 약 85%)과 투치족(약 14%) 간의 민족적 긴장이 존재했다. 식민 당국은 투치족에게 상대적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며 민족 간 분열을 심화시켰다. 1962년 르완다 독립 이후 후투족 중심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투치족은 차별받고 많은 수가 주변국으로 망명했다. 1990년, 망명 투치족이 주축이 된 르완다 애국 전선(RPF)이 르완다 정부군에 대항하여 내전을 시작했다. 1993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후투족 내의 극단주의 세력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에 대한 증오를 광범위하게 선동했다. 이 시기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함웨(Interahamwe)와 임푸자무감비(Impuzamugambi)가 조직적으로 무장했다.
학살의 진행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비아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르완다 수도 키갈리 상공에서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즉각적으로 후투 극단주의자들에게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시작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 사건 발생 수 시간 만에 잘 조직된 민병대와 정부군, 대통령 경호대는 키갈리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 지도자 및 일반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살해를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은 지속적으로 투치족을 '바퀴벌레(Inyenzi)' 등으로 비하하며 학살을 독려했고, 시민들은 마체테(machete), 곤봉, 칼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여 이웃을 살해하도록 선동되었다. 유엔 평화유지군(UNAMIR)은 병력이 감축되고 개입이 제한되어 학살을 막지 못했으며, 국제 사회의 개입은 사태의 규모와 속도에 비해 매우 미온적이거나 지연되었다. 학살은 RPF가 북쪽에서 진격하여 정부군과 민병대를 격퇴하며 7월 중순에 종료될 때까지 100일 동안 지속되었다.
결과 및 영향 르완다 학살은 극심한 인명 피해를 남겼으며, 수백만 명의 후투족이 RPF의 보복을 피해 콩고(당시 자이르)를 비롯한 주변국으로 대거 탈출하여 난민 사태를 야기했다. 학살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국제 연합은 탄자니아 아루샤에 르완다 국제 형사 재판소(ICTR)를 설치했으며, 르완다 국내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 법정인 가차차(Gacaca)를 통해 수십만 명의 학살 가담자들이 재판을 받았다. 르완다는 학살 이후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르완다인으로서의 통합을 강조하며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르완다 학살은 조직적인 인종 청소의 비극성과 국제 사회가 대량 학살을 막는 데 실패한 사례로서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