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5·13 사건

5·13 사건

개요

5·13 사건(말레이어: Peristiwa 13 Mei, 중국어: 五一三事件, 영어: 13 May incident)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발생한 폭력적 인종 충돌 사건이다. 말레이계(말레이족)와 중국계(화교) 주민 간의 충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같은 해 5월 10일 실시된 총선 결과를 둘러싼 정치적·민족적 긴장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사건 명칭은 발생 일자인 5월 13일에서 유래한 날짜 기반 명칭으로, 한국어권에서는 통상 이 말레이시아 사건을 지칭하는 용례가 주로 확인된다(출처에 따라 ‘5.13 사건’으로도 표기).

배경

  • 독립과 경제 구조: 1957년 말라야 연방은 영국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도시 지역과 상업·광공업 부문에서 중국계의 경제적 비중이 컸던 반면, 말레이계는 상대적으로 농촌 지역에 분포하며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였다는 점이 민족 간 긴장의 구조적 배경으로 지적된다.
  • 헌법적 지위: 말레이인의 특별 지위는 독립 당시 제정된 헌법 제153조에 규정되어 있다.
  • 정치적 논쟁: 말레이인 우월주의(케투아난 멜라유, Ketuanan Melayu)의 제도화를 요구하는 말레이계 단체, 중국계의 권익 보호를 주장하는 단체, 그리고 말레이인 특권보다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장한 비(非)말레이계 야당 세력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이어졌다.
  • 연방 결성과 선행 충돌: 1963년 말라야, 싱가포르, 북보르네오, 사라왁을 통합한 말레이시아 연방이 결성되었다. 1969년 폭동 이전에도 1957년 페낭(조지타운 100주년 기념 행사 중 충돌), 1959년·1964년의 소요, 1967년 통화 평가절하 항의에서 비롯되어 인종적 살상으로 확대된 폭동, 그리고 1964년 싱가포르 인종 폭동 등이 있었다. 1964년 싱가포르 사태는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분리에 기여한 요인으로 언급된다.

경과

1969년 총선과 선거 후 정국

1969년 5월 10일 총선은 별다른 사고 없이 치러졌다. 집권 연합인 동맹당(Alliance Party)은 전국적으로 의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의석수가 크게 줄었고, 득표율은 절반에 미치지 못하였다. 동맹당 내 중국계 정당인 말레이시아화인협회(MCA)의 의석은 절반으로 감소하였다. 주(州) 단위에서는 클란탄주와 페락주에서 통제권을 상실하였고, 야당인 게라칸(Gerakan)은 페낭주 정부를 장악하는 등 중국계 지지 정당인 민주행동당(DAP)과 게라칸이 약진하였다.

5월 11일과 12일 밤 DAP와 게라칸은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행진을 벌였다. 일부 행진이 캄풍바루 등 말레이계 지역을 통과하면서 “모든 말레이인을 끝장내라”(Semua Melayu kasi habis), “쿠알라룸푸르는 이제 중국인의 것이다”(Kuala Lumpur sekarang Cina punya) 등의 구호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레이계 측은 이에 대응하는 행진을 계획하였다.

폭력의 발생과 확산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측 행진은 5월 13일 오후 7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국가운영위원회(NOC)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날 오후 6시 30분경 세타팍에서 집회로 이동하던 말레이계 집단과 중국계 구경꾼 사이에 몸싸움이 발생하였고, 이는 병과 돌을 던지는 충돌로 확대되었다. 충돌 소식이 잘란 라자 무다의 집결지에 전해지자 오후 6시 30분 직전 다수의 말레이계가 집결지에서 이탈하여 인접 중국계 거주 지역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파랑(parang)과 크리스(kris) 등으로 무장하여 차량과 상점을 불태우고 약탈·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고되었다. 폭력은 약 45분 이내에 도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저녁 경찰이 투입되어 최루제를 사용하였고, 오후 7시 쿠알라룸푸르에 24시간 통행금지령이 부과되었다. 오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에 경찰청장 모하메드 살레 빈 이스마엘과 군 총참모장 툰쿠 오스만 지와에 의해 각각 사살 명령이 내려졌으며, 군대는 오후 10시경 폭동 지역에 진입하였다. 통행금지령을 알지 못한 주민들이 총에 맞은 사례, 자택 문간이나 정원에 서 있다가 총격을 받은 사례가 보고되었다. 외신 기자들은 왕립 말레이 연대 병사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중국계 상점에 총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건 과정에서 중국계 비밀결사 조직의 대응, 중국계·인도계 상인의 임시 방어 조직 결성, 영화관의 말레이계 관객 피살, UMNO 본부 방화 시도, 경찰서 포위 등 상호 보복성 폭력이 발생하였다. 6월 28일에는 센툴에서 말레이계가 인도계를 공격하여 15명이 사망하는 폭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사상자 및 피해 규모

사상자 수치는 자료 간 차이가 크다.

  • 공식 수치(말레이시아 당국): 사망 총 196명. 민족별로 중국계 143명, 말레이계 25명, 인도계 13명, 기타(미확인) 15명. 부상 439명, 방화 753건, 차량 211대 파괴 또는 심각한 손상.
  • 비공식·외부 추정: 당시 서방 외교 소식통은 사망자를 약 600명으로 추정하였고, 존 슬리밍은 공식 실종자를 포함하여 첫 주에 약 800명으로 추정하였다. 그 밖의 관측자와 특파원들은 네 자릿수 규모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사망자 대부분이 중국계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공식 수치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경찰이 시신을 검시나 조사 없이 매장하거나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다수의 시신이 기록 없이 처리되어 사망자 수 산정이 어려웠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집단 매장지가 쿠알라룸푸르 인근 숭가이 불로 나환자촌에서 촬영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각적 조치

  • 비상사태 및 의회 정지: 5월 14일과 16일에 전국적 비상사태와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다. 5월 15일 국왕 이스마일 나시루딘의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압둘 라자크 후세인 부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운영위원회(NOC, 말레이어: Majlis Gerakan Negara)가 설치되었고, 헌법 일부가 정지되었다. 의회는 정지되어 1971년 2월에 재개되었으며, 이후 18개월간 NOC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기능하였다.
  • 치안 조치: 약 2,000명의 왕립 말레이 연대 병력과 3,60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비무장 자경단, 향토군, 경찰 대대 창설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고, 통행금지령은 단계적으로 완화되었다.
  • 언론 통제: 신문 발행은 5월 15일 중단되었다가 5월 18일 재개되었고, 5월 21일 새로운 검열법이 공포되었다. 외국 출판물 반입이 금지되고 외국 신문 스크랩 소지자가 구금되었다.
  • 비상 조치의 해제: 비상사태 선포는 42년 후인 2011년 12월 의회에서 무효화되었고, 잔여 비상 조례는 2012년 6월에 만료되었다.

영향과 평가

  • 정치적 영향: 이 사건은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의 퇴진과 압둘 라자크 후세인으로의 권력 이양에 영향을 준 중요 사건으로 평가된다. 라만은 1970년 9월 22일 의회 재소집 시기에 맞추어 총리직에서 사임하였고, 라자크가 그 직을 승계하였다.
  • 정책적 영향: 라자크 정부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방향으로 국내 정책을 전환하여 말레이시아 신경제정책(NEP)을 시행하였다. 또한 1970년 8월 31일 국가 이념인 ‘나라의 원칙’(루쿤 느가라, Rukun Negara)이 도입되었다. UMNO는 말레이계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적극적 우대조치를 통해 정치 체제를 재편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연합 재편: 동맹당을 대체하여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이 결성되었고, 게라칸·PPP·PAS 등 이전 야당들이 연합에 참여하도록 초청되었다.
  • 원인에 대한 해석: NOC는 1969년 10월 9일 보고서에서 “인종 정치”를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면서도 말레이계에 대한 책임 규정은 유보하였고, 말라야 공산당과 비밀결사의 역할도 일부 원인으로 제시하였다. 툰쿠 압둘 라만은 야당과 공산주의자의 영향, 중국계 공산주의 청년의 도발을 원인으로 보았다. 2007년 쿠아 키아 송(Kua Kia Soong)은 해제된 영국 대사관 전문을 근거로 이 사건이 군·경찰과 연계된 UMNO 정치 지도부가 툰쿠 압둘 라만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원인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병존한다.
  • 사회적 의미: 이 사건은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민감하고 때로 금기시되는 주제로 남아 있으며, 정치적 민감성으로 인해 공개적 논의가 회피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된다. 사건 이후 말레이계와 중국계 간 민족 관계는 안정되었으나 정치적 수사와 사회경제적 격차로 인해 긴장이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고 서술된다.

추모와 유적

희생자 매장지는 숭가이 불로 나환자촌 부지와 곰바크의 타만 이부코타 무슬림 묘지 두 곳이 있다. NOC 보고서에 따르면 숭가이 불로에는 103명(중국계 99명, 인도계 2명, 말레이계 2명)이 1969년 5월 18일부터 6월 2일 사이에 안장되었으며, 이 중 18명은 “미확인”으로 표시되었다. 다만 일부 현대 보도는 숭가이 불로의 묘비 수를 102개, 112개, 114개 등으로 다르게 전한다. 타만 이부코타 무슬림 묘지의 경우 NOC 보고서에는 18명이 안장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묘지 기록에는 11명만이 매장된 것으로 나타나 차이가 있다. 2024년 9월 슬랑오르주 정부는 숭가이 불로 매장지를 비무슬림 묘지 보존지로 지정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2023년 역사 드라마 영화 《한여름 밤의 눈》이 제작되었다.

각주 및 참고 문헌

  • The National Operations Council (1969). The May 13 Tragedy: A Report.
  • Slimming, John (1969). The Death of a Democracy. London: John Murray Publishers.
  • Tunku Abdul Rahman (1969). 13 May: Before and After. Kuala Lumpur: Utusan Melayu Press.
  • von Vorys, Karl (1975). Democracy Without Consensus: Communalism and Political Stability in Malaysia. Princeton University Press.
  • Cheah, Boon Kheng (2002). Malaysia: The Making of a Nation.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 Kua, Kia Soong (2007). May 13: Declassified Documents on the Malaysian Riots of 1969. Petaling Jaya: Suaram.
  • Ooi, Keat Gin (2004). Southeast Asia: A Historical Encyclopedia, from Angkor Wat to East Timor. ABC-CLIO.

정보 신뢰도 관련 유의 사항

  • 사망자 수를 비롯한 피해 규모, 폭력의 발발 경위와 주도 세력, 원인에 대한 해석은 공식 보고서, 당대 언론, 외교 문서, 후대 연구자 간에 차이가 있으며 확정된 단일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 본 항목의 서술 중 구체적 수치와 정황은 위에 제시된 문헌 및 백과사전류 자료에 근거한 것이며, 출처 간 상충하는 부분은 그대로 병기하였다. 상충 내용을 임의로 단정하지 않았다.
  • 이와 별개로, ‘5·13 사건’이라는 표현 자체는 연월일을 딴 명칭이므로 문맥에 따라 다른 사건을 가리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확인된 한국어·영어권 자료에서는 1969년 말레이시아 사건을 지칭하는 용례가 주를 이룬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