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소동(二月騒動, にがつそうどう)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중기인 분에이(文永) 9년(1272년) 2월, 몽골(원) 침공의 위기를 앞두고 가마쿠라와 교토에서 일어난 호조 씨(北条氏) 일문의 내분이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제8대 싯켄(執権)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의 명으로 모반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받고, 가마쿠라에서는 나고시류(名越流) 호조 씨인 나고에 도키아키라(名越時章)·노리토키(教時) 형제가, 교토에서는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남방(南方)이자 도키무네의 이복형인 호조 도키스케(北条時輔)가 차례로 추토되었다.
배경
분에이 5년(1268년) 정월, 고려에서 온 사자가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하여 몽골(원)과의 수교 및 복속을 요구하는 쿠빌라이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몽골 침공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가마쿠라 막부는 권력의 일원화를 도모하고자 호조 씨 적류(嫡流)인 도쿠소케(得宗家)의 호조 도키무네를 18세의 나이로 제8대 싯켄에 취임시켰다. 도키무네의 이복형(서출)인 호조 도키스케는 그 무렵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 남방으로 나가 있었다. 한편 나고에 씨(名越氏)는 호조 일문 안에서 규슈에 많은 슈고(守護) 직을 보유하여 적류인 도쿠소가 다음으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경과
분에이 9년(1272년) 2월 7일 가마쿠라에서 소동이 시작되었다. 2월 11일, 나고에 도키아키라·노리토키 형제가 도쿠소의 피관(被官)인 미우치비토(御内人)에 의해 주살되었고, 전임 쇼군 무네타카 친왕(宗尊親王)의 측근이었던 나카미카도 사네타카(中御門実隆)가 연금되었다. 나흘 뒤인 2월 15일에는 교토에서 로쿠하라 단다이 북방 호조 요시무네(北条義宗)가 가마쿠라로부터 온 파발을 받고 같은 단다이의 남방인 호조 도키스케를 공격하였다. 많은 사람이 전사하고, 사건에 연좌되어 여러 인물이 처벌되거나 유배되었다. 전임 쇼군 무네타카 친왕은 출가하였다.
이후 나고에 도키아키라에게는 다른 마음이 없었으며 그의 죽음이 오판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나, 그를 죽이는 데 가담한 미우치비토 5인이 책임을 물어 9월 2일 처형되었다. 도키아키라의 아들 긴토키(公時)는 소유 영지를 안도받았다.
결과
2월 소동으로 막부 내부의 도쿠소 권력이 강화되었고, 대몽골 강경 정책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 나고에 도키아키라가 원래 보유하던 규슈 지쿠고(筑後)·오스미(大隅)·히고(肥後)의 슈고직은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오토모 요리야스(大友頼泰)에게 넘어갔다. 교토에서는 도키스케와 전임 쇼군 무네타카 친왕의 이름을 빌린 반(反)도쿠소 운동이 봉쇄되어 반항 세력이 일소되었고, 도쿠소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다.
사건의 진상에 대한 학계의 해석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는 2월 소동이 이국경고(異国警固)의 인사 문제를 둘러싼 막각(幕閣)의 불일치로 인해 미우치비토의 주도로 일어났다고 보았다.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는 도키무네의 독재 정권 확립을 노린 사건으로, 이를 통해 도키무네가 자신이 비정한 지도자임을 연출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사건의 내력을 "명분 없는 살육에 대한 비판이 일자 당황해서 집안(미우치비토)을 희생시켜 수습했다"고 평가하였다. 도키무네와 함께 사건의 주체였던 전임 싯켄 마사무라(北条政村)의 의향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후 몽골(원)의 일본 침공(몽고습래)이라는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 구조가 도쿠소케 중심으로 재편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 중세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