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싱가포르 총선은 1959년 5월 30일 싱가포르에서 입법의회 의원 51명 전원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총선이다. 이는 영국으로부터 국방 및 외교를 제외한 완전한 내부 자치를 부여받은 후 처음으로 치러진 총선으로, 싱가포르 현대사의 전환점으로 널리 인식된다.
배경
1955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전선(LF) 정부는 데이비드 사울 마셜 최고장관의 지도 아래 영국과의 자치 협상을 추진했으나, 완전한 내부 자치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마셜이 사임했다. 그의 뒤를 이은 림유혹은 식민 당국에 대해 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취하면서 좌익 및 공산주의 연계 단체에 대한 강경 진압을 펼쳤다. 그러나 반공 정책으로 중국계 유권자들의 상당 부분이 소외되었고, 노동전선은 내부 분열과 부패 의혹으로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
1958년 싱가포르(헌법) 칙령으로 알려진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렌델 헌법을 대체했다. 개정 헌법에 따라 싱가포르는 입법의회를 완전히 선출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양 디페르투안 네가라를 국가원수로, 총리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직책이 신설되었다. 또한 이번 선거부터 보통선거와 의무투표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선거 과정
선거에는 10개 이상의 정당에서 총 194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주요 경쟁 구도는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PAP)과 림유혹이 창설한 싱가포르 인민동맹(SPA) 사이의 대결이었다. 인민행동당은 저렴한 공공 주택 제공, 교육 시스템 확장, 산업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을 통한 독립 달성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 운동 기간 중 츄스위키 사건이 주요 논란으로 부상했다.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츄스위키가 해외로부터 거액의 정치 기부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후 이 자금이 중화민국(대만) 정부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싱가포르 인민동맹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결과
선거 결과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유효 득표율은 54.08%였다. 싱가포르 인민동맹은 4석, 통일 말레이 국민조직(UMNO)은 3석, 무소속이 1석을 얻었다. 노동전선과 자유사회주의당은 한 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의무투표제와 보통선거의 도입으로 투표율은 90.07%를 기록했으며, 이는 1955년 총선의 52.66%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 등록 유권자 586,098명 중 527,919명이 투표했다.
여파
선거 후 리콴유는 1959년 6월 5일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인민행동당은 영국 식민 행정부의 간섭 없이 국내 정책을 담당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으나, 영국은 국방과 외교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인민행동당의 결정적인 승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기 집권의 시작을 알렸으며, 1965년 완전한 주권 획득을 향한 중요한 단계로 평가된다.
이후 인민행동당 내부에서는 중도주의 지도부와 좌익 파벌 사이의 균열이 발생했고, 1961년 대부분의 좌익 의원들이 축출되어 바리산 소샬리스(BS)를 결성했다. 이는 인민행동당에 가장 심각한 선거 도전을 제기했으나, 1963년 냉장 작전으로 좌익 세력의 추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