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다이빙은 1908년 하계 올림픽(런던)에서 치러진 정식 경기 종목의 하나로, 남자부 2개 세부 종목이 실시되었다. 당시 다이빙은 별도의 독립 종목이 아니라 수영 경기 프로그램의 일부로 운영되었으며, 같은 프로그램에는 수영과 수구(water polo)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 종목은 정식 경기로 채택되지 않았고, 7월 18일에 여성 2명에 의한 시범 경기(exhibition)만 열렸다.
경기장 및 일정
경기는 런던 셰퍼드스부시(Shepherd's Bush)의 화이트 시티 스타디움(White City Stadium) 내부에 설치된 야외 수영장에서 열렸다. 이 수영장은 길이 100미터, 너비 15미터, 수심 1.2~3.7미터 규모였으며, 사용하지 않을 때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접이식 다이빙 타워가 설치되어 있었다. 타워와 수영장 설계는 왕립구명협회(Royal Life Saving Society) 사무총장 윌리엄 헨리(William Henry)가 맡았다.
두 종목의 개최 시기는 다음과 같다.
- 3미터 스프링보드(공식 명칭상 'fancy diving'): 1908년 7월 14일~18일
- 10미터 플랫폼(공식 명칭상 'high diving'): 1908년 7월 20일~24일
공식 명칭과 관련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두 종목을 각각 '3미터 스프링보드'와 '10미터 플랫폼'으로 표기하지만, 1908년 공식 보고서에는 'high diving'(높은 다이빙)과 'fancy diving'(화려한 다이빙)으로 기재되어 있다. 실제 경기 방식도 단일 높이의 보드에서만 실시된 것이 아니라, high diving은 10미터와 5미터 플랫폼을, fancy diving은 3미터와 1미터 스프링보드를 함께 사용하였다.
참가 규모
두 종목을 합쳐 9개국에서 39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종목별로는 3미터 스프링보드에 8개국 23명, 10미터 플랫폼에 6개국 24명이 출전하였다. 참가국은 독일, 스웨덴, 미국, 영국, 핀란드, 벨기에, 캐나다, 이탈리아, 오스트랄라시아(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연합)였다. 국가별 출전 인원은 종목당 최대 12명으로 제한되었다.
경기 방식
두 종목 모두 각 라운드에서 의무 다이빙 4개와 선택 다이빙 3개, 모두 7개의 다이빙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스프링보드는 1미터와 3미터 보드에서, 플랫폼은 5미터와 10미터 플랫폼에서 실시되었다. 대회는 1차 예선, 준결승, 결승의 3단계로 치러졌으며, 1차 예선은 3~6명씩 조를 나누어 조별 상위 2명이 준결승에 진출하는 구조였다.
채점은 심판 3명이 각 다이빙에 대해 0점에서 10점까지 0.5점 단위로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1908년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두 종목의 난이도 반영 방식에 차이가 있었는데, high diving(플랫폼)에서는 심판 점수에 다이빙별 난이도를 곱하였고, fancy diving(스프링보드)에서는 난이도를 심판 점수에 더하였다. 또한 최종 순위는 피겨 스케이팅과 유사한 서열(point-for-place) 방식으로 결정하도록 규정되었으나, 심판별 개별 점수와 서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서열 산정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1908년 대회의 기록상 한계로 지적된다.
메달리스트 및 결과
3미터 스프링보드
- 금: 알베르트 취르너(Albert Zürner, 독일)
- 은: 쿠르트 베렌스(Kurt Behrens, 독일)
- 동: 조지 게이직(George Gaidzik, 미국) 및 고틀로프 발츠(Gottlob Walz, 독일) — 3위 동점으로 동메달 2개 수여
10미터 플랫폼
- 금: 얄마르 요한손(Hjalmar Johansson, 스웨덴)
- 은: 칼 말름스트룀(Karl Malmström, 스웨덴)
- 동: 아르비드 스폰베리(Arvid Spångberg, 스웨덴)
메달 집계는 독일이 금 1·은 1·동 1(3개), 스웨덴이 금 1·은 1·동 1(3개), 미국이 동 1개를 획득하였다. 10미터 플랫폼에서는 스웨덴 선수들이 결승 1~4위를 모두 차지하였다.
주요 사건 및 논란
10미터 플랫폼 1차 예선에서 영국의 조지 케인(George Cane)이 다이빙 후 물속에서 의식을 잃었고, 이를 발견한 얄마르 요한손(훗날 금메달리스트)이 뛰어들어 구조하였다. 케인은 큰 부상 없이 회복되었으나 며칠간 침상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당시 위험하다고 여겨진 더블 섬머솔트 동작을 금지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이후 이 동작은 1928년까지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종목 준결승에서는 미국의 유력 우승 후보였던 조지 게이직이 3위에 그쳤는데, 심판 한 명이 게이직이 지상에서 팀 동료의 신호(코칭)를 받았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각 다이빙 0점을 주고 실격 처리하였다. 미국 측의 항의가 받아들여져 게이직은 결승에 추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3미터 스프링보드 결승에서는 3위 동점이 발생하여 동메달이 두 개 수여되었다.
여성 참가
1908년 대회의 다이빙 정식 종목은 남자부만 운영되었다. 다만 7월 18일 핀란드의 발보르그 플로르스트룀(Valborg Florström)과 스웨덴의 에바 기시코(Ebba Gisico)가 여성 다이빙 시범을 보였다. 여성이 수영 및 다이빙에서 공식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12년 스톡홀름 대회부터이다.
평가 및 이후
1908년 런던 대회에서 수영장이 육상 경기장 내부에 함께 조성되어 다이빙 경기가 다른 주요 국제 경기와 같은 경기장에서 치러진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한편 대회 후 수영 및 다이빙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더블 섬머솔트 금지, 선수에게 신호를 보내는 행위 금지, 출발 신호를 권총으로 통일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다이빙 종목은 이후 하계 올림픽의 정규 종목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출처
- Cook, Theodore Andrea (1908), 《The Fourth Olympiad, Being the Official Report》(British Olympic Association)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대회 결과 데이터베이스
- Olympedia(국제올림픽역사학회 계열 데이터베이스) 'Diving at the 1908 Summer Olympics' 항목
- 영문 위키백과 'Diving at the 1908 Summer Olympics' 및 세부 종목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