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1907년 1월 25일 독일 제국의 하원인 국가의회(Reichstag) 의원 397명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이다. 이 선거는 당시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서 치러졌으며, 특히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헤레로·나마 봉기 진압과 관련된 논쟁이 선거 국면을 크게 좌우하였기 때문에 당대 독일에서는 '호텐토트 선거'(Hottentottenwahl)라고도 불렸다. 투표율은 84.7%로, 등록 유권자 약 1,335만 명 중 약 1,130만 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이 선거는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부여된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권에 기초하여 실시되었다. 다만 당시 선거구 획정이 인구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여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 간 의석 배분의 불균형이 존재했는데, 이는 사회민주당(SPD)과 같은 도시 기반 정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선거 결과, 득표율 기준으로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약 29.0%의 득표율(약 325만 9천 표)로 최다 득표 정당이 되었으나, 의석수는 43석에 그쳐 이전 선거(81석)보다 38석이 감소하였다. 반면 독일 중앙당은 득표율 19.4%(약 217만 9천 표)에 불과했지만 105석을 획득하여 국가의회 내 최대 정당으로 자리하였다. 국민자유당은 14.5%(약 163만 표)로 54석, 독일 보수당은 9.4%(약 106만 표)로 60석을 얻었다. 그 밖에 독일 자유당 28석, 자유보수당 24석, 폴란드인 정당 20석, 자유연합 14석 등을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상당한 유권자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소선거구제와 균등하지 않은 선거구 배분으로 인해 득표율에 비해 크게 적은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사회민주당의 의석 감소는 당시 선거구 제도의 불리함 외에도 선거 국면에서의 정치적·선거 전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반면 중앙당은 가톨릭 교회와의 연계를 바탕으로 농촌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유지하며 최대 정당의 지위를 이어갔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제12대 독일 국가의회가 구성되었으며, 이후 수상이었던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의 주도로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 연합이 형성되어 소위 '뷜로우 블록'(Bülow-Block)이라는 연정 구도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은 이후 세제 개혁을 둘러싼 갈등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 선거는 독일 제국 시기 식민지 문제가 국내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 사례로,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이 투표에서는 강세를 보였음에도 의석 배분에서 불리함을 겪는 제국의회 선거제도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