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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공황

1819년 공황(영어: Panic of 1819)은 미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금융위기이다. 이 공황은 코튼 벨트(Cotton Belt) 지역에서의 서부 확장을 둔화시켰고, 이후 1821년까지 지속된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붕괴가 뒤따랐다. 이 공황은 미국이 유럽과의 식민지 상업적 지위에서 독립적인 경제로 전환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 종료된 후 유럽은 평시 생산과 상업 체제로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전반적인 영향으로 금과 은의 실물화폐(경화) 부족으로 인한 서구 세계 전반의 물가 하락이 나타났다. 한편 미영 전쟁(1812~1814) 이후 미국과 영국 간 무역이 재개되면서, 영국산 제조품이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 시장에 유입되어 많은 미국 제조업체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유럽 대륙은 전쟁으로 농업 생산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주요 농산물(면화, 밀, 옥수수, 담배)에 대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다.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미국 남부와 서부에서는 투기적인 농업 토지 붐이 발생했고, 이는 연방 정부의 공공 토지 판매 조건 완화에 의해 더욱 부추겨졌다. 역사가 조지 데인저필드(George Dangerfield)는 "전후 미국 경제 전체가 토지 붐에 기반을 두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제2은행의 설립과 운영

1811년 미국 제1은행의 재인가 실패로 주(州) 은행들에 대한 규제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주 공인 은행의 수가 1811년 88개에서 1815년 208개로 급증했다. 미영 전쟁 중 미국 정부는 이들 은행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대출받으면서 지폐 발행을 장려했고, 이는 인플레이션과 투기 거품을 초래했다.

이에 대응하여 1816년 4월,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미국 제2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SBUS) 설립 법안에 서명했다. SBUS는 1817년 1월 20년 기한의 정관 하에 운영을 시작했다. 중앙은행의 주요 목표는 주 공인 은행들의 전후 인플레이션 관행을 역전시키고, 일반 대중의 은행 신용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SBUS는 초기부터 여러 난관에 직면했다. 경화 부족으로 인해 은행은 충분한 금속 화폐 보유고를 확보하지 못했고, 초대 총재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는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으나 은행가로서의 역량은 부족했다. SBUS의 18개 지점들은 필라델피아 본부나 재무부의 실질적 감독 없이 운영되었으며, 서부와 남서부 지점들은 과도한 대출을 통해 토지 투기를 부추겼다.

공황의 발발

1817년 유럽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농업 생산을 회복하여 풍작을 거두면서, 미국 농산물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급감했다. 농산물 가격은 절반으로 하락했고, 특히 면화 가격은 1819년 1월 하루 만에 25% 폭락했다. 영국은 고가의 미국산 면화 대신 동인도 면화 수입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남서부 농장들의 타격이 컸다.

1818년 여름, SBUS는 신용이 위험할 정도로 과도하게 확장되자 급격한 신용 축소 정책을 시작했다. SBUS는 모든 주 공인 은행 지폐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1818년 10월 미국 재무부는 SBUS에 200만 달러의 경화 이체를 요구했다. 경화를 제공할 수 없었던 서부와 남부의 주 은행들은 자신들이 자금을 대준 토지에 대한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현금이 부족한 농민과 투기꾼들은 토지 가치가 50~75% 하락하는 것을 목격했고, 은행들은 저당 잡힌 농장과 사업체를 압류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금융 공황은 광범위한 파산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다.

영향과 대응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경제 위기를 당시 통용되던 좁은 통화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정부의 행동을 긴축과 재정 안정 확보로 제한했다. 그는 은행 예금주들에 대한 경화 지불 중단에 동의했으며, 이는 이후 1837년 공황과 1857년 공황의 선례가 되었다.

1821년 의회는 공공 토지 채무자 구제법(Relief for Public Land Debtors Act)을 통과시켜,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채무자들이 이미 지불한 부분을 소유하고 나머지 채무를 포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많은 주 의회들, 특히 서부 농촌 지역에서는 추가적인 채무자 구제 조치를 시행했다.

SBUS의 총재는 윌리엄 존스에서 랭던 치브스(Langdon Cheves)로 교체되었고, 치브스는 강력한 긴축 통화 정책을 시행하여 은행을 건실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불황을 심화시켰으며, 한 비평가는 "은행은 구원되었고, 사람들은 파멸되었다"고 평가했다.

장기적 영향

1819년 공황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채무 구제 정책과 빈곤 구제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도시 및 주 정부는 빈곤 문제에 대한 공공 정책 개혁에 보다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공교육 시스템 발전으로 이어졌다.

보호 관세에 대한 지지가 다시 증가했으나, 1828년 '혐오스러운 관세(Tariff of Abominations)' 시행으로 촉발된 지역적 불만은 1832~1833년 무효화 위기(Nullification Crisis)로 이어졌다.

경제사학자들은 1819년 공황이 미국이 현대 경기순환(business cycle)에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폭넓게 동의한다. 또한 이 공황은 많은 미국 시민들이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후일 텍사스 공화국 및 텍사스 주가 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학적 해석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은 1819년 공황으로 인한 전국적 경기후퇴를 확장적 통화 정책의 첫 실패 사례로 본다. 이 이론은 머리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의 1962년 박사 학위 논문 《1819년 공황(The Panic of 1819)》에서 처음 상세히 설명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경기순환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

케인스 경제학 이론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1819년 공황이 모든 현대 경제에 공통적인 호황-불황 주기를 초기 미국 공화국이 처음 경험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 & 메리 대학의 경제학 교수 클라이드 홀먼(Clyde Haulman)은 공황이 부분적으로 SBUS의 대출 회수 결정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는 미국 경제 역사에서 성숙한 시장 제도들이 순환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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