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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

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네덜란드어: Chinezenmoord, '중국인 학살'; 인도네시아어: Geger Pacinan, '차이나타운 소요'; 중국어: 紅溪慘案, '홍계참안')은 174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통치하던 항구 도시 바타비아(현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중국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포그롬 사건이다.

배경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바타비아 건설과 경제 활동을 위해 많은 중국인 이주민을 유치하였다. 중국인들은 숙련된 장인, 상인, 설탕 공장 노동자, 상점주 등으로 활동하며 바타비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740년경 바타비아 시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약 10,000명에 달했으며, 성벽 밖에는 더 많은 수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720년대 이후 세계 설탕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바타비아의 설탕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740년에는 설탕 가격이 1720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네덜란드 당국은 중국인 이주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다. 1730년대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수천 명이 사망한 이후, 중국인에 대한 의심과 적대감이 증가하였다. 1740년 7월 25일, 아드리안 발케니어(Adriaan Valckenier) 총독은 수상한 중국인을 실론(현재 스리랑카)으로 추방하여 계피 수확에 강제 노동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들은 부유한 중국인들을 추방으로 위협하며 갈취하기도 하였다.

발단과 전개

1740년 9월, 정부의 탄압과 설탕 가격 하락으로 중국인 사회에 불안이 고조되자 발케니어 총독은 모든 반란은 치명적인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740년 10월 7일, 수백 명의 중국인(대다수는 설탕 공장 노동자)이 네덜란드 군인 50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네덜란드군은 중국인들의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통행금지를 명령하였다.

10월 9일, 중국인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바타비아 민족 집단이 베사르 강(Besar River)을 따라 중국인 가옥에 불을 질렀고, 네덜란드 군인들은 중국인 주택에 대포를 발사하며 보복하였다. 폭력은 곧 바타비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발케니어 총독은 10월 11일 사면을 선언하였으나, 비정규 조직들은 계속해서 중국인을 사냥하고 살해하였다. 폭력은 총독이 더 강력하게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한 10월 22일까지 시내에서 지속되었다. 성벽 밖에서는 네덜란드군과 폭동을 일으킨 설탕 공장 노동자들 간의 충돌이 11월 말까지 이어졌다.

피해 규모

역사학자들은 최소 10,000명의 중국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생존자는 600명에서 3,0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약 5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여파

이 학살은 자바 전역으로 확산되어 1741년부터 1743년까지 2년간 지속된 자바 전쟁(Java War, 1741-1743)을 촉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중국인과 자와인 연합군은 네덜란드 군대와 맞서 싸웠다.

발케니어 총독은 이후 네덜란드로 소환되어 학살과 관련된 범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구스타프 빌럼 반 임호프(Gustaaf Willem van Imhoff)는 학살 이후 바타비아의 경제가 마비되자 중국인 이민을 다시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역사적 의의

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식민 통치 하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인종·경제적 갈등 사례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문헌에 많이 등장하며, 자카르타의 여러 지역 이름의 어원으로도 인용된다. 중국어권에서는 '홍계참안'(紅溪慘案, '붉은 시내의 참사')으로 불리며, 화교(해외 중국인) 역사에서 중요한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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