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타 고키(일본어: 廣田 弘毅, 1878년 2월 14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제3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인물이다.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현재의 주오구 가자마치도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조타로였다. 아버지는 도쿠베이로, 히로타 가문에 입양된 채석공이었다.
히로타는 슈유칸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하였다.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유럽과 미주국의 국장, 네덜란드 주재 공사, 소련 주재 일본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33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외무대신이 되었고, 이어진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직을 유지하였다. 외무대신 재임 중인 1935년 10월 28일, 대중국 외교 기본 방침으로 '히로타 3원칙'을 공포하였다. 이 원칙은 중국 측에 만주국 승인, 공산주의 세력 배제 협력, 불평등조약 개정을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었으나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오카다 내각이 붕괴하자, 히로타는 제3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936년 3월 9일부터 1937년 2월 2일까지 재임하였다. 총리 재임 중에는 전쟁대신과 해군대신의 지위에 현역 군 장교만 임명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군부를 진정시키는 한편, 나치 독일 및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반코민테른 협정 체결을 추진하였다. 총리직은 약 1년 미만 유지되었으며, 육군대신 데라우치 히사이치와의 갈등 이후 사임하였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으나, 군부의 중국 침략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1938년 은퇴를 강요당했다. 1945년에는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지도하기 위해 정부에 복귀하였으나,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언하면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히로타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침략 전쟁 수행, 중화민국에 대한 도발되지 않은 전쟁 수행, 전쟁 법률 위반 방지 의무 태만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 23일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히로타는 도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유일한 문관(민간인 신분 정치인)으로, 그의 사형 선고의 엄격성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다. 특히 난징 대학살 관련 정보를 접하고도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이 주요 범행으로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