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勳舊派)는 조선 전기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 세력이다. '훈구(勳舊)'라는 용어는 본래 "중요한 공로를 세워 공신에 책봉된 나이 많은 신하"를 뜻하는 '원훈구신(元勳舊臣)'의 줄임말로,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주 사용되었다.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는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학자 집단을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로 정착되었다.
훈구파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계기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그 뒤 세조 즉위 이후 이어진 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정난공신·좌익공신·적개공신·익대공신·좌리공신)이었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권람(權擥) 등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들은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공신전과 별사전 등을 통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으며, 공물 방납과 무역에도 관여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실용적 관학파(官學派)로 평가되며, 신숙주·정인지·최항 등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재직한 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등 주요 관찬 사업을 주도하여 국가 제도 정비와 학문 발달에 기여하였다.
성종 재위 중반 이후 신진 세력인 사림파(士林派)가 삼사(三司)를 거점으로 진출하여 훈구파의 권력 독점과 경제적 비리를 비판하면서 두 세력 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갈등은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네 차례의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로 폭발하였으며, 그때마다 사림파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선조(宣祖)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점차 몰락하였고, 잔존 세력은 대부분 서인(西人)에 흡수되었다.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 훈구파는 세조 집권기부터 성종 때까지 중앙 정치를 주도한 핵심 지배층으로 평가된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도덕적 선악 구도로 대비한 점, 지배층 가문의 연속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점 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