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명제(後漢 明帝)는 중국 후한(東漢)의 제2대 황제이다. 정식 시호는 효명황제(孝明皇帝)이며,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휘는 유장(劉莊)으로, 본래 이름은 유양(劉陽)이었다.
출생과 즉위 이전
명제는 28년(건무 4년)에 광무제(光武帝)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광렬황후 음씨(陰氏)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열 살에 《춘추》를 통달하는 등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 39년에 동해공(東海公)으로 책봉되었고, 41년에 동해왕으로 승격되었다. 43년에는 이복형인 황태자 유강(劉彊)이 어머니 곽황후(郭皇后)의 폐위로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유양이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이때 이름을 유장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학자 환영(桓榮)에게 《상서》를 배웠다.
즉위와 치세
57년 광무제가 사망하자 유장은 서른 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는 아버지인 광무제의 통치 방침을 계승하여 정치를 안정시켰으나, 외교 분야에서는 광무제의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수정하고 서역(西域) 진출을 적극적으로 재개하였다. 이 정책을 통해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가 서역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명제의 치세는 유교를 장려하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안정된 통치를 이어갔으며, 후한이 약 200년간 지속되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그의 황후인 마황후(馬皇后)는 후한의 장수 마원(馬援)의 딸로, 현명한 통치자로서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전래
명제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정식으로 전래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즉위 기간 중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창건하고 불경과 불상을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중국 최초의 사찰로 전해진다. 또한 명제의 이복형인 초왕 유영(楚王 劉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부처를 숭배했다"는 기록이 《후한서》에 남아 있다. 다만 불교 전래의 구체적인 경위와 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망과 후임
75년 명제는 48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인 제5남 유달(劉炟)이 장제(章帝)로 즉위하였다.
역사적 평가
명제의 치세는 아버지 광무제 및 아들 장제와 더불어 후한의 안정된 전성기를 이룬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이후 후한에서는 어린 황제가 잇달아 즉위하면서 외척과 환관 사이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이것이 결국 후한 멸망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