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학(黃柄學, 1876년 ~ 1931년)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인적 사항
황병학은 1876년 전라남도 광양현 진상면 비촌리(현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에서 황재모(黃在模)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영문(英文)이다. 창원 황씨 족보에 따르면 그는 골상이 굵직하고 눈에 광채가 있었으며, 장성하여 뜻과 기상이 뛰어나고 역사를 논할 때가 많았다고 전한다.
의병 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통분히 여긴 황병학은 황사중(黃士中)·한성순(韓性純)·고견(高堅)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규합하여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병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 모병함으로써 수백 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望德灣)에 일본 선박 수십 척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야밤에 기습 공격하여 선박을 침몰시키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이후 옥곡면(玉谷面)을 근거지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주의 일본군 수비대 본부를 기습 공격하여 무기 다수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많은 동지를 잃었으며,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활동과 최후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 4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등 공식 자료에 수록되어 있다. 공훈전자사료관에도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1968년 독립장 서훈 기록이 확인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병학」
- 위키백과, 「황병학」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