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당 사건(皇民黨事件)은 198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와 관련하여 우익 단체인 일본황민당(日本皇民黨)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후 1992년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 공판 과정에서 재조명되면서 정치적 파장을 확대시켰다.
1987년,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퇴임을 앞두고 후임 총재 선거가 예정되었다. 유력한 차기 총재 후보로는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등이 거론되었다. 이 가운데 다케시타 노보루에 대하여 우익 단체인 일본황민당이 '일본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다케시타 씨를 총리로 하자'는 내용의 가두 연설을 전개하였다. 이는 다케시타를 실제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와 비꼼의 의도로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배경에는 다케시타가 자유민주당 내에서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든 데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민당의 집요한 비난 공세로 인해 다케시타는 정치적 압박을 받았고, 이에 다케시타의 측근인 가네마루 신과 오자와 이치로 등이 폭력단과 연결된 사가와큐빈의 사장 와타나베 히로야스에게 중개를 의뢰하였다. 와타나베는 광역 폭력단인 이나가와회(稻川會)를 연결해 주었고, 이나가와회는 황민당과 두 차례 회담을 가진 끝에 다케시타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직접 사과하는 것을 조건으로 황민당의 비판을 중단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다케시타가 다나카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황민당의 다케시타 비판은 종료되었다. 다만 당시 다나카는 뇌경색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다케시타를 실제로 만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황민당의 활동을 제지하는 대가로 이나가와회에 50억 엔이 제공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로 인해 다케시타는 훗날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증인 신문을 받았다. 다케시타는 일부 사실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도의적 책임은 인정하였으나 의원직 사퇴는 거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회의사당 등 주변 지역 및 외국 공관 등 주변 지역의 평온의 유지에 관한 법률」(일명 황민당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1992년 11월 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사가와큐빈 사건 공판에서 우익 활동가 오시마 류민(大島龍珉)이 검찰 조사 당시의 진술 조서를 법정에서 공개하면서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당 조서에는 당시 황민당의 다케시타 비판을 중지해 줄 것을 설득하는 데 나섰던 자민당 의원 7명(가네마루 신, 모리 요시로, 하마다 고이치,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우오즈미 히로히데, 우라타 마사루)의 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하마다, 우오즈미, 우라타는 황민당과의 접촉을 인정하였으나 나머지 4명은 사실무근이라며 반발하였다. 자민당은 오시마의 조서 낭독이 당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며 강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법무대신이 조서 내용이 불확실하였다고 인정하면서 자민당은 추가 대응을 중단하였다.
한편 가네마루 신은 황민당 사건을 막기 위해 이나가와회 등 폭력단과 접촉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강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으니 폭력단이라도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발언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 전체의 한 축을 이루었으며, 일본 정계의 정경유착과 폭력단 개입 문제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