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홍우원

홍우원(洪宇遠, 1605년~1687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남인(南人) 계열의 중진 인물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등을 지내며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옥사가 날조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이 일로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는 제1차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朞年說, 1년복 주장)을 비판하고 윤선도·허목·윤휴 등의 주장에 동조하였으며,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파직·금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예안현감과 고성군수 등을 지내며 세금 감면 등 선정을 베풀었다.

숙종 즉위 초 제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응교로 복직된 뒤 승지, 부제학, 대사헌, 공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76년(숙종 2)에는 대사성,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참찬으로 재직하며 대동미 감량, 납속자에 대한 불신 해소 등을 진언하여 반영시켰다. 1678년 공조판서가 되어 각 아문의 둔전 혁파와 4군영문 재정의 은포 징수 방안을 주장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명천 등지로 유배되었고, 1687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작되었고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후 정국 변동에 따라 관작이 추탈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1795년(정조 19) 최종적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남파집』 13권이 있으며, 안성의 남파서원과 백봉서원에 제향되었다. 학문이 고명하고 성품이 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남인 내에서도 청남(淸南) 계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