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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생애

홍양호는 1724년(경종 4년) 서울 훈도방 진고개(현재 충무로 2가 일대)에서 아버지 홍진보(洪鎭輔)와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3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충청도 내포 지역의 외가에서 성장하였으며, 외숙인 심육(沈錥)에게 학문을 배웠다. 심육은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인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었다.

1747년(영조 2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영조 2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처음 진출한 이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64년에는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합덕지(合德池)의 보수 공사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게 부탁해 벚나무 묘목을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었다. 1770년(영조 46년) 황해감사로 부임하여 연안의 남대지(南大池)를 준설하고 제방을 보수하는 등 수리 사업을 추진하였다.

1777년(정조 1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이후 1781년 한성부우윤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 평안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임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801년 판중추부사에서 물러났고, 1802년(순조 2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청나라 사행(使行)과 학문 교류

홍양호는 두 차례 북경(北京)을 방문하였다. 1782년(정조 6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94년(정조 18년)에는 동지정사로 다시 청나라에 들어갔다. 두 번째 연행에서는 청나라의 석학이자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을 주도한 기윤(紀昀, 1724~1805)과 교유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청나라의 학문과 서양 서적을 수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청나라 고증학을 조선에 수용·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술 및 학문적 성과

홍양호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집으로는 《이계집》(耳溪集) 37권이 있으며, 이 외에도 《육서경위》(六書經緯), 《군서발배》(群書發排),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흥왕조승》(興王肇乘), 《삭방습유》(朔方拾遺), 《북새기략》(北塞記略), 《만물원시》(萬物原始), 《향약절중》(鄕約折中) 등이 있다.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牧民大方)도 저술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능하였으며, 수원성 북문루의 상량문(上梁文)과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경세사상

홍양호는 실학적 경세관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된다. 청나라 연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진육조소'(陳六條疏)를 올려 수레 사용(車制), 벽돌 사용(甓法), 당나귀와 양 사육(牧驢羊), 구리 그릇 사용 금지(禁銅器), 사치품 모자 수입 제한(罷帽子), 중국어 학습(肄華語) 등 여섯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북관(北關) 지역의 국경을 직접 답사하고 실지회복(失地回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폐사군(廢四郡)의 후주(厚州) 지역에 읍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평가

홍양호는 18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관료로, 소론계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리학뿐 아니라 역사, 지리, 문자학, 경제, 과학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을 남긴 경세가이자 실학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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