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칠(洪淳七, 1929년 1월 23일 ~ 1986년 2월 7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 경비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생애 초기 및 군 경력
1929년 1월 23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미군정 하의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함경남도 원산 인근에서 부상을 입었고, 1952년 7월 특무상사(육군 상사)로 전역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홍순칠은 1952년 가을부터 부산에서 무기와 장비를 사비로 구입한 뒤, 한국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군 출신 인원을 모아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고 자신의 수기에서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키백과 및 여러 자료에 따르면, 1966년 독도의용수비대원 11명이 훈장을 받을 때 작성된 공적조서에는 창설 시기가 195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 대원의 병적 기록에 따르면 1953년에 군에서 전역하지 않은 사례도 있어 창설 시기와 관련하여 이견이 존재한다. 또한 1954년 5월 3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울릉도 도민들이 '독도자위대'를 결성하였고, 당시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이정윤이 빠지면서 홍순칠이 대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두진 국무총리의 지시에 따라 울릉경찰서가 독도자위대에 총기와 탄약을 지급하고 울릉군이 구휼미로 식량을 지원한 사실이 울릉경찰서 경찰관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홍순칠은 수기에서 1953년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 조치하고, 1953년 7월 23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과 총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5년 대한민국 내무부가 발행한 '독도문제개론'에 따르면, 1953년 7월 11일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순라반(경위 김진성, 경사 최헌식, 순경 최용득)이 일본 선박 해쿠라호를 격퇴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홍순칠의 주장과 차이가 있다.
홍순칠은 1953년 8월 5일 독도 동도 바위 벽에 '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수기에 기록하였다. 한편 독도 영토 표석 건립은 1953년 9월 24일 대한민국 외무부가 요청하고 내무부 장관이 경상북도지사에게 측량표 설치를 지시한 공문에 따라 1954년 8월 28일에 이루어졌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울릉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중도 사퇴하였다.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같은 해 12월까지 국립경찰과 공조하여 독도 및 인근 해상에 대한 경비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말년 및 사후
1966년 정부로부터 독도 수호 공적을 인정받아 5등 근무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독도에 나무 옮겨심기, 대형 태극기 설치, 급수장 설비 등 독도 지키기 및 가꾸기 활동을 지속하였다. 1985년 폐암 치료를 위해 서울로 이사하였고, 잡지 《학부모》에 독도 관련 연재를 하던 중 1986년 2월 7일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후인 1996년 보국훈장 삼일장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이 추서되었다. 2005년 '독도의용수비대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홍순칠을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으며,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논란 및 검증 문제
홍순칠이 남긴 수기의 내용 중 일부가 과장되었거나 허위라는 의혹이 언론에서 제기된 바 있다. 2007년 대한민국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 활동한 독도의용수비대 생존 대원 11명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실제 독도에서 활동한 대원은 33명 중 17명이며, 나머지 16명은 독도에 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순칠의 미망인 박영희 씨는 1974년 12월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독도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5년 특별법에 따라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 내역 및 상훈 범위가 결정되어 훈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