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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홍병기(洪秉箕, 1869년 11월 5일 ~ 1949년 1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인이다. 천도교에서 받은 도호는 인암(仁菴)이다. 본관은 남양이며,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아버지 홍익룡과 어머니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초기 생애와 동학 입교

홍병기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았으며, 1887년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1890년까지 3년간 세자익위사에서 조선의 하급 무관으로 활동하였다. 1892년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손병희 휘하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박인호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망명 중이던 손병희로부터 진보회 창설 지시를 직접 받고 머리를 자르는 갑진개화운동에도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과 독립운동

1919년 손병희가 주도한 3·1 운동에서 홍병기는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손병희 사망 이후 천도교 내에서 최린의 신파와 이에 대항하는 구파 외에 소장파를 중심으로 반일 항쟁을 기도하는 파벌이 형성되었고, 1922년경 경성에서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홍병기는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중화민국 만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천도교 연합회라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절대적 평등과 개인의 수양을 지향하며 공동 경작 생활을 하였다. 1924년에는 천도교 최고비상혁명위원회를 재조직하기도 하였다.

1926년 지린에서 최동희, 김봉국 등 천도교 혁신파가 정의부와 연합하여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창당할 때 고문으로 참가하였다가 검거되어 다시 징역 2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광복 이후

해방 이후 홍병기는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충칭에서 환국하자 삼일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총성 선서식을 거행하였으며, 임정 계열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감개무량한 심기로 조용히 칩거하다가 1949년 1월 26일 서울에서 트럭에 치여 사망하였다.

사후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그를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출옥 후 고려혁명당 설립에 참여한 천도교인·독립운동가"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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