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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

홍계훈(洪啓薰, 1842년~1895년)은 조선 후기의 무장이다. 초명은 홍재희(洪在羲)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1842년 무관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를 자신의 등에 업고 궁궐 밖으로 피신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이후 포천 현감, 충청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되어 장위영 군사 800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총공세 대신 위협적인 포격과 회유 전략을 병행하였고, 전봉준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1894년 6월 전주화약을 성립시켜 유혈 충돌 없이 농민군을 철수시켰다. 이 공로로 훈련대장에 승진하였다. 한편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는 청일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장 겸 훈련대 연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던 중, 궁궐을 침범한 일본군과 훈련대 내 친일파 군인들을 질책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사망 당시의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는데, 《고종실록》은 광화문 밖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하였고, 《대한계년사》는 궁궐 안에서 칼을 맞아 죽었다고 하였으며, 《매천야록》은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기록하였다.

사후 군부대신에 추증되었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1900년 명성황후를 지키다 함께 순국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함께 장충단(獎忠壇)에 제향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을 "졸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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