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란트 왕국(네덜란드어: Koninkrijk Holland, 프랑스어: Royaume de Hollande)은 1806년부터 1810년까지 네덜란드 지역에 존재했던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위성) 왕국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바타비아 공화국의 공화정을 대체하고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세웠으며, 그의 셋째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네덜란드명 로데베이크 1세, Lodewijk I)를 초대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개요
홀란트 왕국의 수도는 시기에 따라 헤이그(1806~1808년), 위트레흐트(1808년), 암스테르담(1808~1810년)으로 옮겨졌다. 정치 체제는 입헌 군주제였으며, 공용어로는 네덜란드어가 사용되었고 프랑스어, 저지 독일어, 프리지아어도 통용되었다. 화폐는 네덜란드 휠던(guilder)이었다. 국왕은 1806년부터 1810년까지 로데베이크 1세, 1810년에 잠시 그의 아들 로데베이크 2세가 재위했다. 왕국의 표어는 "화합이 힘을 만든다"(Eendragt maakt magt)였다.
역사적 배경
홀란트 왕국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뒤를 잇는 국가였다. 1801년 바타비아 공화국은 바타비아 연방으로 재편되었고, 이후 루트헤르 얀 스히멀페닝크(Schimmelpenninck)가 대판사(Grand Pensionary)로 취임하여 공화국을 재중앙집권화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네덜란드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과 영국 압력에 대한 취약함을 문제 삼아 군주제 도입을 추진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 외교관들에게 8일 내에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제시했고, 정부 구성원 다수는 국민 투표 없이 이 조약을 비준했다.
영토 변화
왕국은 수립 당시 대략 현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영토를 아우르되 림뷔르흐(Limburg) 지방과 일부 젤란트(Zeeland) 지역은 제외되었다. 1807년에는 독일의 동프리슬란트(East Frisia)와 예버(Jever) 지역이 왕국에 병합되었다. 1809년 발헤렌 원정(Walcheren Campaign) 이후에는 라인강 이남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해야 했다.
로데베이크 1세의 통치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의도한 것과 달리 프랑스의 단순한 대리인(prefect)이 되기를 거부하고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이름을 로데베이크로 변경했으며 스스로를 네덜란드인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도입한 정책에는 전국적 세금 제도 개편, 시민 등록제, 토지 등기 제도, 보증법 도입, 프랑스 형법을 기반으로 하되 네덜란드 관습을 존중한 형법 및 민법 개정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유대인, 가톨릭 신자, 비국교자의 평등을 추진했으며, 왕립 네덜란드 예술과학 아카데미와 릭스뮤지엄의 전신인 왕립박물관의 설립을 지원했다.
재난 상황에서의 대응으로도 알려져 있다. 1807년 라이덴 화약 폭발 사고, 1808년 젤란트 홍수, 1809년 베튀어 홍수 때 국민을 위해 행동하여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선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왕국의 종말
나폴레옹과 로데베이크 1세 사이의 갈등은 주로 국채 처리 문제, 프랑스를 위한 징집 문제,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 집행 문제로 인해 심화되었다. 로데베이크는 징집을 거부하고 대신 고아들을 군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대한 반발로 1809년 로테르담에서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륙봉쇄령에 대해서도 부실한 집행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네덜란드 해상 무역의 붕괴를 우려한 결과였다.
1810년 3월 조약을 통해 남부 영토가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같은 해 7월 프랑스군이 암스테르담을 점령했다. 로데베이크 1세는 7월 1일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퇴위했으나, 나폴레옹의 칙령에 따라 홀란트 왕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프랑스 제1제국에 합병되었다. 이는 1813년까지 지속되었다.
의의
홀란트 왕국은 1581년 이후 네덜란드 영토에 수립된 최초의 공식 군주국으로 기록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유럽에서 프랑스가 세운 여러 위성 왕국 중 하나였으며, 네덜란드 역사에서 프랑스 지배기(1795~1813)의 한 단계를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