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취훈(胡就勳, 1894년 5월 29일 ~ 1947년 2월 27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감리회 목사이다.
개요
호취훈은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석찬리(현재의 온천군 대령리 일대)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감리회 신자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생애
출생과 학력
호취훈은 1894년 5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아버지 호태합(胡泰合)과 덕수 이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종로보통학교(1907년 졸업)와 평양고등보통학교(1913년 졸업)를 거쳐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와 원산 협성신학교에서 각각 1년씩 수학하였으나 모두 중퇴하였다.
3·1운동 참여
1919년 2월 27일 호취훈은 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감리교 청년회장으로서 진남포 신흥리 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3월 1일 홍기황(洪基璜)이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 감명을 받아 향리로 돌아갔다. 이후 1919년 3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장터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이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호취훈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재판 과정에서 검사가 무식함을 이유로 잘못을 인정하라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못이 없다. 우리나라 대한이 독립하였다는데 내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와 관련된 재판 기록은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도 그 형적(刑績)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생년월일이 1899년 7월 30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위키백과 등에 기록된 1894년 5월 29일과 차이가 있어 출처에 따라 기록이 상이함을 확인할 수 있다.
출감 이후의 활동
1920년 5월 만기 출감한 호취훈은 온천교회(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장찬리)를 설립하고, 과수원을 경영하여 그 수익으로 학림학교(鶴林學校)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과 민족 정신 및 근대 계몽 정신 고취에 힘썼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석구(申錫九) 목사와 함께 독립 운동 관련 자금을 모집하여 매년 1회씩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로 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온정리교회(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로 재직하였다.
광복 이후와 사망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호취훈은 소련 군정 하의 북조선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군납을 하였다는 이유와 대지주(호족 계급)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이력과 교회·학교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군보급창으로 사용된 사실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 다만 투옥 과정에서 겪은 고문과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1947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3월 1일을 기하여 호취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호취훈은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형 호도훈과 남동생 호모훈도 감리교 활동에 함께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림학교는 1909년 호도훈 권사와 호취훈 권사에 의해 설립된 감리교회 부설 교육기관으로, 1935년 당시 학생 수 162명에 교장 1명과 교사 3명이 봉직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 문헌
- 위키백과 "호취훈" 문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용강군지》(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