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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앙께비엠

호앙께비엠 (베트남어: Hoàng Kế Viêm, 黃繼炎, 1820~1909)은 응우옌(Nguyễn) 왕조 시기의 베트남 장군이자 내각대학사(東閣大學士)였다. 본명은 호앙따비엠(Hoàng Tá Viêm, 黃佐炎)이며, 자(字)는 녓쯔엉(Nhật Trường), 호(號)는 뚱안(Tùng An)이다.

생애 초기

1820년 꽝빈성(Quảng Bình) 꽝닌현(Quảng Ninh)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앙낌썬(Hoàng Kim Xán, 黃金燦)은 카인호아(Khánh Hòa) 지방의 포정사(布政使)를 지냈다. 1843년, 호앙께비엠은 민망(Minh Mạng) 황제의 다섯째 딸 응우옌푹꽝띤(Nguyễn Phúc Quang Tĩnh)과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이듬해 공주는 임신 중 2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티에우찌(Thiệu Trị) 황제는 그녀에게 흐엉라(Hương La) 공주라는 칭호를 내렸다.

군사 활동

국경 지역 도적 토벌

호앙께비엠은 19세기 후반 베트남 북부 국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각종 도적 세력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70년, 후에(Huế) 조정은 그를 랑선(Lạng Sơn), 타이빈(Thái Bình), 닌빈(Ninh Bình)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똔텃투옛(Tôn Thất Thuyết)과 함께 북부 지역의 산적을 진압하게 했다.

이 시기 베트남 북부에는 청나라 남부 출신의 흑기군(Black Flags, 유영복/劉永福 지휘), 황기군(Yellow Flags), 백기군(White Flags) 등 여러 무장 세력이 존재했다. 호앙께비엠은 조정과 흑기군 사이의 연락관 역할을 수행했으며, 유영복에게 라오까이(Lào Cai) 주변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권유하여 흑기군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침략 저항

1873년, 프랑스 군인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가 하노이를 공격하자, 호앙께비엠은 유영복과 흑기군에게 하노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공격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1873년 12월 21일, 흑기군은 가르니에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880년대 초, 프랑스의 통킹(Tonkin)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호앙께비엠은 흑기군 및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프랑스에 저항했다. 1883년 5월 19일, 흑기군은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ère)를 사살했다. 이후 청프전쟁(Sino-French War, 1884~1885) 시기에는 선떠이(Sơn Tây) 등지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다.

말년

1884년, 후에 조정의 소환 명령에 따라 호앙께비엠은 수도로 복귀했다. 이후 프랑스 보호령 체제 아래에서 공공사업부 감독관으로 강등되었다. 강등 후 고향인 꽝빈성으로 은퇴했다.

1886년, 동카인(Đồng Khánh) 황제가 즉위한 후 그를 다시 내각대학사로 복직시키고, 함응이(Hàm Nghi) 황제와 그 추종자들을 회유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1887년 조정으로 복귀했다.

1909년(일부 자료에는 1902년으로 기록), 꽝빈성에서 사망했다.

평가

호앙께비엠은 19세기 후반 베트남이 직면한 내부 혼란과 외세 침략이라는 이중 위기 속에서 국경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고 프랑스 식민지 침략에 저항한 응우옌 왕조의 주요 장수로 평가된다. 흑기군과의 협력 관계 유지, 청나라와의 외교적 조율 등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수호하려 노력한 인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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