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7세(Henry VII, 1457년 1월 28일 ~ 1509년 4월 21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485년 ~ 1509년)으로, 튜더 왕조(House of Tudor)의 창시자이다. 본명은 헨리 튜더(Henry Tudor)이며, 즉위 전에는 리치먼드 백작(Earl of Richmond)으로 불렸다.
생애와 즉위 배경
헨리 7세는 웨일스 펨브로크셔의 펨브룩 성에서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 보퍼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헨리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사망하였고, 외가 쪽으로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손이었다. 헨리 7세는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년~1487년) 시기에 랭커스터파를 대표하였으며, 요크파의 에드워드 4세가 왕위를 되찾은 1471년 이후 브르타뉴에서 14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1485년, 헨리 튜더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에 상륙하였고,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에서 요크파의 국왕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살해하였다. 이 전투는 장미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으며,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역사상 마지막으로 전장에서 왕위를 차지한 국왕이 되었다.
통치와 주요 정책
헨리 7세는 왕위에 오른 후 요크의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와 결혼하여 랭커스터파와 요크파를 통합하였고, 이를 상징하는 '튜더 장미'(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결합)를 창조하였다. 그의 통치는 대체로 평화롭고 번영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정책으로 평가된다.
첫째, 재정 정책에 있어 헨리 7세는 매우 효율적인 통치자였다. 세금, 봉건 부과금, 임대료, 벌금 등을 통해 국가 수입을 재위 기간 동안 두 배로 늘렸다. 그의 재상 존 모턴 대주교가 고안한 '모턴의 포크'(Morton's Fork)는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후 조사에서 과세 과정의 광범위한 남용이 적발되었고, 그의 아들 헨리 8세는 가장 미움을 받던 두 세무 관리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처형하였다.
둘째,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평화 유지와 경제 번영을 목표로 하였다. 1489년 브르타뉴와의 레동 조약, 1492년 프랑스와의 에타플 조약, 스페인과의 메디나 델 캄포 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와의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딸 마거릿 튜더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시켰으며, 이는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위의 통일(1603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무역 정책에 있어서는 1496년 '매그너스 인터커스스'(Magnus Intercursus, 대협정)를 통해 플랑드르와의 무역을 재개하여 잉글랜드 경제에 큰 이익을 가져왔다. 또한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존 캐벗(조반니 카보토)의 뉴펀들랜드 항해(1497년)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넷째, 법치와 행정에 있어서는 별실 재판소(Court of Star Chamber)를 부활시켜 신속한 재판을 가능하게 하였고, 치안 판사(justices of the peace)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지방 통치를 강화하였다. 또한 귀족들의 사병 보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반란과 위협
헨리 7세의 왕위는 여러 차례 도전을 받았다. 1487년 램버트 심넬(Lambert Simnel)이 워릭 백작을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스트스토크 전투에서 진압되었다. 1490년대에는 퍼킨 워벡(Perkin Warbeck)이 요크 공작 리처드를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1497년 진압되고 1499년 처형되었다. 헨리 7세는 심넬에게는 관대하게 처벌하여 왕실 부엌에서 일하게 한 반면, 워벡과 같은 더 심각한 위협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하였다.
가족과 사망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는 7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장남 아서(웨일스 공)가 1502년 15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왕비 엘리자베스는 1503년 출산 중 사망하였다. 이후 헨리 7세는 재혼을 고려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헨리 7세는 1509년 4월 21일 서리주 리치먼드 궁전에서 결핵으로 사망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왕위는 차남인 헨리 8세가 계승하였다.
역사적 평가
헨리 7세는 장미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를 안정시키고, 재정을 건전하게 회복시켰으며, 튜더 왕조의 기반을 확립한 군주로 평가된다. 17세기 역사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통치를 분석한 저서를 남겼다. 다만 그의 엄격한 세금 징수 방식과 재정적 집착은 생전에 귀족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과세 과정의 남용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그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의 중요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